#13. 봄과 여름사이의 향수.

by 물에물탄듯

#13. 봄과 여름사이의 향수.


대학교 3학년이 되고 신입생이 들어왔다. 간호학과는 남학생이 많이 드문 학과이지만, 그 해에는 10명 중 2명 정도 비율이 되었다. 신입생이라도 나이는 다양하게 입학했던 것 같다. 신입생 환영회를 마치고 11인 11색 동기들의 직속 후배들을 다 같이 불러 저녁을 먹었다. 11명 모두 오지는 않았던 것이 다행이었다. 저녁을 먹고 술집을 3차까지 갔다. 갈 사람들은 가고 한 6명 정도 남았을 때 우리는 나나 집에서 다 같이 기절했다. 이 날 쓴 돈만 40정도가 나왔고, 후배 상관없이 각자 참여한 술집까지 돈을 나눠 계산했다. 학생이 무슨 돈이 있었다고, 우리는 허세에 선배놀이를 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아직도 모임에서 이야기가 나온다. 그 때 유난히 눈에 들어왔었던 강릉에서 왔던 남자후배가 있었다. 키도 크고 말투도 상냥했다. 이 후배를 보고 두근거렸던 정아는 스스로 웃기다고 생각했다. 남자 선배와 여자 후배가 만나는 것도 아니고, 여자 선배와 남자 후배가 만나다니.. 지금까지 그런 적도 없었으며 가당치도 않는 분위기가 상상이 되었다. 정아는 그렇게 혼자 멀~~ 리 생각하고 접었다. 술자리 이후 후배들과는 친해졌다. 여자 후배들은 위아래 관계가 부담스러워서 밥을 사달라고 한 적이 없었는데 남자 후배들이 밥 사달라고 하면서 여자 후배들과도 같이 먹는 횟수가 늘어났고 가까워졌다. 남자 후배들 덕분에 우리 학과 분위기가 바뀐 건 확실했다. 여기서 강릉이는 11명 모임 동기들의 직속 후배가 아니었는데, 정아의 남자후배를 따라온 것이었다. 강릉이는 이미지가 좋아서 정아의 동기들이 후배들 밥 사줄 때면, 항상 같이 오라고 챙기곤 했다.

어느 날 정아가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데, 강릉이 가 바나나 우유를 건네주며 폰 번호를 물었다. 강릉이의 눈웃음을 본 후 번호를 안 줄 수가 없었다. 그 후 강릉이 가 따로 연락 온 것이 없어서 정아 혼자 또 멀~~~ 리 생각하다가 접었다. 1학년 소수 남자 중 규태라는 남자애가 있었다. 규태는 21살이었고, 4차원의 느낌이 강했다. 규태가 정아에게 후배가 아닌 남자로 연락을 했고, 정아는 싫지는 않았다. 규태와 밥도 먹고 학교를 걸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규태가 연락이 오는 것에 대해 11명 친구 중 좀 더 친했던 빡이와 나나에게는 이야기를 했었다. 친구들은 선후배 관계는 무시하고 그냥 좋으면 만나라고 했다. 연락하고 지낸 지 한 달쯤 지나 주땡이랑 주말에 밥을 먹는데 주땡이 규태랑 연락을 하고 지낸다고 했다. 정아는 당황스러웠지만 주땡에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정아는 화가 나고 기분이 몹시 나빴지만 규태를 주땡과 사이에 두고 사이가 나빠지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규태의 매력이 거기까지 였던 것 같다. 규태는 주땡과 사귀기 시작했고, 규태와 정아가 연락하던 사이인걸 알았던 친구들은 더 어이없어했고 규태를 친구의 남자 친구지만 멀리했다. 주땡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 규태와의 만남이 눈치 보이기 시작했던 것 같다. 정아는 그 후 학과 공부에만 집중했다.

3학년 1학기 중간고사를 준비하면서 학교 도서관을 자주 갔고, 늦게 스쿨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날이 많아졌다. 도서관에는 강릉이도 항상 있었다. 강릉이는 정아가 집에 가는 시간에 비슷하게 공부를 끝냈고 매너 좋게 늦은 시간 스쿨버스를 같이 기다려줬다. 강릉이의 모습에 '뭐야, 이렇게까지 왜하지?' 라며 규태에게 기분 나쁜 상황으로 강릉이의 친절은 보이지도 않았다. 주말에는 같이 밥도 먹곤 했다. 카카오톡을 주고받으면서 강릉이의 공부도 도와줬고, 우리는 개인생활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간호학과는 실습기간 학교를 가지 않기 때문에 학교 일정에 관심이 없다. 그런데 행사로 수업이 일찍 마친 날 강릉이가 말도 없이 실습지에 정아를 데리러 온 것이었다.

정아는 강릉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쳤고,

동기가 “저기 강릉이 아냐?.”

정아는 어리둥절하여

“강릉이가 여기 왜와~ 잘못 봤겠지~”

라며 동기의 손가락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말 강릉이가 서 있었다. 키가 182cm, 어깨가 넓고 슬림한 몸매에 흰 티와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강릉이가 우리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고,

정아에게 “정아 선배님 보러 왔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난리가 났다.

“뭐야 뭐야. 이거 뭔데. 무슨 상황인데.” 정아는 쿵했다.

정아를 두고 나머지 동기들이 어깨동무를 하며 뒷걸음을 치기 시작했다.

“내일 봐~”라고 하며 모두들 꺼져줬다.

잠시 정아는 강릉이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 미친 건가. 이제는 동기끼리 나를 바보로 생각하는 건가’

규태 사건으로 부정적이기만 했던 정아였다. 모두가 가고 강릉이는 눈웃음을 지으며

“선배님 집에 같이 가요~”.

강릉이는 여러 가지 질문을 했고, 정아는 거리를 두고 걸었다. 강릉이가 가던 길을 멈췄다.

“선배님. (정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저 나쁜 사람 아니고, 선배님이랑 가까워지고 싶어요. 사실 여기까지 오기 엄청 고민했어요. 제 마음 좋게 봐주시고, 맛있는 것도 먹고 즐겁게 집 가요.”

정아는 마음을 이해하고 씨잇 웃었다.


그날은 정아에게 아직도 향수로 남아있다. 바람이 살짝살짝 불고, 초록색 잎이 나무를 덮고 흔들리는 계절이었다. 강릉이 쪽에서 부는 바람에는 섬유유연제 향기가 따라와 정아의 코 끝에 앉았다. 우리는 정말 먼 거리를 많은 이야기를 하며 걸었다.

해가지고, 학교 운동장에 앉았다. 강릉이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규태형 이야기 저도 알아요.”

“응?”

“규태형이랑 같은 기숙사 살아서 자세한 건 몰라도 이야기는 들었어요. 그래서 규태형이 먼저 좋아한다고 말해서 선배랑은 연락을 안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 타이밍에 1학년 동기가 좋다고 표현해줘서 거기에 집중했어요. 근데 선배가 계속 생각났어요. 규태형이랑 주땡 선배랑 사귄다고 들었을 때는 화가 나서 혼자서 말도 안한적도 있고요.

선배. 이제 규태형도 다른 선배랑 만나고 관계가 정리된 것 같고, 저도 저 좋다는 동기는 눈에도 안들어오고, 제가 표현해야 될것 같아서 고민하다가 찾아왔어요.”

정아: “나는 사실 너가 말도 없이 찾아와서 나쁘게 오해할 뻔했어. 그래도 내가 선배인데, 돌아가면서 장난치나 싶었거든. 근데 이렇게 따로 마음을 이야기해줘서 고마워.”

강릉: “매일 연락하고 싶어요. 그리고 이제 저 혼자 몰래몰래 안보고 싶어요.”

강릉이는 정아의 기숙사 입구까지 데려다주고 갔다. 강릉이의 향기가 정아의 옷에도 묻어 기숙사 방까지 따라 들어왔다. 기숙사에 들어오니 룸메이트가 더 흥분된 상태로 계속 질문했다. 정아는 질문이 들리지도 않고 갑자기 심장이 시리고, 콩닥거리고, 혼자 웃기 시작했다. 규태는 똥차였고, 벤츠가 온 것 같았다. 강릉이는 정말 성격도 좋고 공부도 잘해서 모두가 칭찬하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웃기게 혼자 1일 시작이었다.

그날 실습지 정문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강릉이의 웃는 모습이 눈앞에서 떠나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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