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ㅇ이 왔다감

추억은 못 됩니다

by 배유정

아내와 장모님, 장인어른과 청주 청남대에 놀러 갔습니다. 옛 대통령들 별장이라 그런지 참 넓고 예쁩니다. 돌아다니다 보니 우리 두 커플이 좀 비슷합니다. 장모님은 몇 걸음 뗄 때마다 아니 이게 무슨 꽃이야? 이게 무슨 나무야? 하시고, 장인어른은 쿨하게 무슨 꽃, 무슨 나무 하고 알려주십니다. 저는 장인어른만큼 잘 알지는 못하지만 나름 풀떼기 좋아하는지라 아내가 물어보면 꽤 많이 대답해줍니다. 모녀가 저게 뭐야? 하고 남편들이 그건 뭐지~ 하면서 열심히 구경합니다. 그래도 어찌나 넓은지, 반의 반도 못 본 것 같습니다.


하룻밤 자고 돌아오기 전에 근처 구경을 다닙니다. 여기저기 있는 공원, 전망대까지 하나같이 절경입니다. 번데기 한 컵 사 먹고 정자 아래에서 잠깐 바람 쐬며 쉽니다. 그러다 문득 저 높은 곳에 써 놓은 이름들이 눈에 띕니다. 흔한 ‘ㅇㅇ이 왔다 간다’ 류의 낙서입니다. 어찌 올라가서 썼는지는 몰라도, 저 정도 정성이면 미워하지도 못하겠습니다. 여기저기 놀러 다니며 보는 뻔한 낙서들에 화가 나지만, 나름 자기들한테는 추억이었을 것입니다. 기분 좋게 놀러 왔으니 이해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몇 년 전, 한참 난임 시술 때문에 병원에 들락거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직 절망은 아니었던, 하지만 둘 다 지쳐가고 있던 때로 기억합니다. 몇 년을 숨어서 속 썩이던 자식놈이 갑자기 얼굴을 들이밀었습니다. 마른하늘에 소나기처럼, 그야말로 갑자기 찾아왔습니다. 너무 놀라 한참을 멍하니 가만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좋아서 우는 아내를 안고 같이 훌쩍거렸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녀석은 갑자기 떠났습니다. 뭐가 그리 급한지 그냥 왔다 가버렸습니다. 귓가에 살랑살랑 봄바람 부나 했더니, 때아닌 태풍에 내 숨소리도 안 들립니다. 하늘이 무너집니다. 다 무너져서 다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는데 세상은 우리 빼고 잘만 돌아갑니다.




왔다 가는 것은 다 추억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자식놈 왔다 가는 것은 추억 안 됩니다. 추억 못 됩니다. 얼굴이나 봤으면, 얼굴이나 알았으면 좀 나았을까요. 내 자식 얼굴도 모르지만, 그래도 혹시 나중에 저 세상에서 만나면 묻고 싶습니다. 너한테는 추억이었냐고. 아빠는 아니었다고. 속 썩였으니 지금이라도 맴매 좀 해야겠다고.

이전 13화카톡 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