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이

이름 좀 불러주세요

by 배유정

고등학생 때, 나중에 결혼해서 자식을 가지면 이름을 뭘로 지을지 고민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고민은 마흔이 되어서야 해결되었습니다. 배씨는 예쁜 이름이 많지 않아서 오래 걸린 것 같습니다. 이십 년 넘게 이어진 고민 속에서, 솔직히 아들 이름 고민은 크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딸을 갖고 싶었나 봅니다. 난임 부부 짬이 십년이 넘은 지금, 아직 딸은 없지만 딸 이름은 있습니다. 저는 준비된 유정이 아빠입니다.




유정이라는 이름을 마음에 새긴 그 해는 유난히 힘들었습니다. 사실 기억에 남은 것이 별로 없습니다. 한 해가 통째로 사라진 느낌입니다. 한동안은 감정의 소용돌이가 가시가 되어 안팎으로 자신과 남을 찔렀습니다. 그리고 감정이 사라졌습니다. 화가 100인 것보다 0일 때가 훨씬 위험하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나의 스위치가 팍 하고 꺼지기를 바라는 마음 외에 어떠한 소망도 원망도 없던 어느 날, 처음으로 마음 치료를 받았습니다.


시간이 흘러, 여기저기서 새어 나오듯이 감정이 다시 스며들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시집 한 권을 내고도 남을 만큼의 시가 쏟아졌습니다. 언젠가 나이가 들면 소설 한 편쯤 써야지, 했을 뿐 시를 쓰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가 자꾸 쌓여서 느닷없이 출판을 했습니다. 쏟아진 시를 글로 옮기는 데 일주일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시집 <아빠도 가봤어>는 그렇게 덜컥 세상에 나왔습니다. 오라는 딸은 십 년을 불러도 안 오는데, 팔자에 없던 책이 한 달여만에 제 발로 찾아왔습니다. 어디 알리지는 못했지만 노래도 만들었습니다. 나만 아는 노래를 가끔 혼자 흥얼거립니다.




사실 <아빠도 가봤어>를 만들면서 작가명은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필명을 짓는 것은 귀찮기도 하지만, 괜히 멋있는 척 했다간 언제 이불을 찰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냥 내 이름이면 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유정이를 많은 사람이 불러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르는 사람이 많으면 크게 들리지 않을까, 그러면 유정이가 듣고 달려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빠도 가봤어>는 배유정이 배유정 이야기를 쓰는데, 배유정이 배유정이 아닙니다. 이상합니다. 그래도 신경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많이 불리기만 하면 됩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브런치에서도 그러기로 했습니다. 물론 언젠가 진짜 유정이가 오면 주인에게 돌려줘야 할 이름입니다. 안 그러면 글을 쓸 때마다 허락받아야 하는데,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습니다.




난임은 흔한 주제가 아닙니다. 관심을 갖는 독자가 매우 한정적인 주제입니다. 드러내기 힘든 아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글을 공유하는 사람은 적고, 숨어서 찾는 사람만 많습니다. 젊은 부부, 혹은 미혼, 혹은 결혼해서 바로 아이를 가진 부부들에게는 전혀 공감이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 속에 제가 파고들어 횃불을 들고, 앞장설 테니 따라오라고 할 생각은 없습니다. 브런치의 다른 작가님들도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난임에 대한 글들은 에세이보다 메모 같습니다. 테이블에 살짝 내려놓은 메모입니다. 조용조용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오래 읽기 힘이 듭니다. 어린 생명이 내 몸에 잠시 돋아났다 사라져버린 나날을 담담하게 써놓은 글은 몇 줄만 읽어도 눈앞이 뿌옇습니다. 하얀 바탕에 까만 글씨가 칼로 새긴 비명 같아서 귀가 아픕니다. 댓글도 없습니다. 다른 일이었으면 어머, 그러셨어요, 하면서 또 다른 자잘한 이야기가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저는 단지, 유정이 이름을 많이들 불러주셨으면 하고 글을 씁니다. 이런 황당하고 이기적인 이유로 글을 쓴다는 것이 우습겠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아빠도 가봤어>도 경험의 공유나 위안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수익이 생기면 난임 부부들을 위해 기부하려고 했는데 별로 안 팔려서 유감이기는 합니다. 미천한 시집을 굳이 찾아서 읽어 주시고 위안을 받았다는 분들께는 오히려 제가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이기적인 이유로 쓴 책인데 고맙다고 해주시니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브런치에서도, 그리고 앞으로도 언제나 같은 이유로 글을 쓸 생각입니다. 위안은 여전히 목적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힘들다고 찡얼찡얼, 감성팔이하는 글은 없습니다. 다른 건 됐고, 가시는 길에 유정이 이름 한 번씩만 불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소망하시는 이름도 알려주세요. 저도 진심을 담아 불러 드리겠습니다. 품앗이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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