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덕후 감독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시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메멘토>에서는 한 사람의 시간을 거꾸로 보여주었고, <인셉션>에서는 시간의 속도가 다른 세계들을 보여주었습니다. 제작자로 참여한 <트랜센던스>는 죽음 이후에까지 시간을 더 얻은 존재와 주변인의 삶을 그렸고, <인터스텔라>에서는 블랙홀을 통한 시간 왜곡의 영향을 그렸습니다. <테넷>에서는 시간을 조작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그는 이 작품들로 관객들의 시간을 누구보다 많이 수집했습니다. 가히 시간덕후 감독님이라 할 수 있습니다.
<메멘토>, <인셉션>, <인터스텔라>가 시간에 대한 아쉬움을 주로 그렸다면, <트랜센던스>와 <테넷>은 시간에 대한 욕망을 주로 그렸습니다. 아쉬움과 욕망의 형태가 모두 달라 참으로 다채롭습니다.
시간을 향한 감정의 가장 흔한 형태들은 이렇습니다.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시간이 조금만 더 있다면’, 그리고 ‘이대로 시간을 멈출 수 있다면’입니다. 각각 시간의 비가역성, 유한성, 통제 불가능성으로부터 오는 좌절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터스텔라>가 비가역성과 유한성을, <트랜센던스>가 유한성을, <테넷>이 비가역성을 주로 다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메멘토>와 <인셉션>은 다른 작품들과 약간 결이 다릅니다.
<메멘토>가 시간을 보여주는 방식은 유명합니다. 시간을 조각조각 나누어 일부는 뒤에서부터, 일부는 앞에서부터 보여줍니다. 사람은 원래 시간을 거꾸로 생각하지 않는 탓에, ‘뒤에서부터’는 거꾸로가 아닌 조각 단위로만 뒤에서부터입니다. 각 조각은 앞에서부터 볼 수밖에 없습니다.
내용은 더욱 특이합니다. 비가역성을 해결하는 방식 때문입니다. 돌이킬 수 없이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시간에 좌절한 이들은, 주로 타임머신이나 사고로 인한 시공간 이동에 기댑니다. 그런데, <메멘토>에서 레너드는 단기 기억 상실이라는 자신의 특성을 너무나 잘 이해한 나머지, 몇 분 후의 자신에게 중요한 정보를 전달하지 않거나 왜곡해서 전달함으로써 시간의 비가역성을 해결합니다. ‘예전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는’ 자신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끊임없이 형사 놀이를 합니다. 복수심에 불타도록 설정된 현재의 마음을 효율적으로 이용함으로써, 이제 모두 끝났다는 허무함과 단절된 철창 속에서 복수의 달콤함만 끝없이 맛보는 것입니다. 비가역성을 해결한 대가로 쳇바퀴 속에 갇힌 것 같지만, 레너드에게는 아무 상관 없기에 처벌이 아닙니다. 가끔 엉뚱한 생각이 들더라도 몇 분 후면 사라져, 결국 놀이는 끝나지 않습니다.
<인셉션>은 놀란의 시간에 대한 생각이 가장 많이 표현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놀란은 꿈속의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는 설정과 꿈속의 꿈이 가능하다는 설정을 결합하여 무한에 가까운 시간을 창조해 냈습니다. 유한성을 해결하는 방식은 <맨 프럼 어스>, <하이랜더>처럼 그냥 오래 살거나, <사랑의 블랙홀> 등과 같이 타임 루프 속에 갇히는 방식이 가장 흔합니다. 이들은 대체로 수동적인 방식으로, 스스로 통제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인셉션>의 방식은 정반대입니다. 림보에 빠질 리스크와 원치 않는 인셉션에 현실의 자아가 오염될 리스크까지 지고 스스로 선택하는 적극적인 방식입니다. 게다가 마블의 퀵실버처럼 빨리 뛰어다니지 않아도, 꿈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저 너머 현실의 시간은 알아서 느리게 가고 있으니 편리하기까지 합니다.
꿈의 레벨이 깊어질수록 시간의 속도도 빨라진다는 설정은 비가역성도 일부 해결했습니다. 꿈속에서 빠르게 흐르는 시간을 오롯이 살고 현실로 돌아오면 결국 과거로 돌아오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현실의 시간을 과거로 되돌릴 수는 없기에 ‘일부’이지만, 어쨌든 <인셉션> 속 인물들은 끊임없이 시간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간여행은 상당히 유용해 보입니다. 아픔을 겪은 이에게 시간의 유한성만을 해결해 준다면, 결국 기나긴 세월 속에 잊혀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세월 동안 세상도 함께 변해 갑니다. 하지만 <인셉션>에서는 다채로운 꿈속에서 긴 시간을 보내고, 상처를 잊은 채로 현실로 돌아오는 것이 가능합니다. 세상은 그대로 있고, 상처만 삭제된 셈입니다. 코브가 유서프를 만나서 보았던 ‘매일 잠들러 오는 이들’이 사실 ‘깨어나러 오는 이들’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 가능하지만, 최소한 능력 계발 시간의 부족을 겪고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도망쳐서 도달한 곳에 천국은 없다지만, 꿈의 세계는 예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셉션>이 그린 시간의 모습들은 유난히 가슴이 아픕니다. 결국, 어찌 됐든 모든 것은 꿈이라는 본질 때문일 것입니다. 깊은 꿈속 세계에서 코브와 멀이 함께 보낸 노년도 결국 꿈일 뿐입니다. 그나마 남아 있던 ‘함께 꾼 꿈’이라는 의미도, 현실의 멀이 스스로 세상을 등지면서 사라지고 맙니다. 코브는 멀을 잃었고, 그가 가진 지나치게 많은 시간은 스스로를 비극으로 이끌었습니다. 사이토를 구하기 위해 헤맨 긴 세월은 오로지 아이들에게 돌아가기 위한 것이며, 그 어떤 보상도 주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에게 돌아간 현실의 코브는 오히려 그 누구보다 지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누구나 긴 세월을 쉽게 얻을 수 있어도, 다수가 현자가 되지는 못하나 봅니다. 시간은 제한될 때는 기회를 주지만, 그렇지 않으면 <인 타임>에서처럼 늘어날수록 희석되어 가치를 잃는 것 같습니다. 놀란의 작품들에서 발랄하게 그려진 시간은 보이지 않고, 그나마 약간 방향성이 다른 <테넷>은 그저 욕망에 찌들어 있을 뿐입니다. 놀란은 시간의 모습을 다양한 각도에서 카메라에 담았지만, 그 역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 외에 획기적인 무언가를 발견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