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9일 새벽 3시 30분.
육백마지기에서 별을 보았던 날을 기록합니다
이번 강원도 여행의 첫 번째 목적은 '천상의 화원 곰배령'을 보는 것으로 시작했다.
5월의 곰배령은 야생화보다 연두연두한 초록이 온 산에 꽃처럼 피어있었다.
이상기후로 전날 내렸던 강원도의 폭설로 인해, 멀리 마주한 설악산 대청봉에 쌓인 눈도 보였다.
꽃피는 5월에 쌓인 눈이라니... 알프스가 이런 모습이려나? 싶어지는 풍경이다.
곰배령까지 달려가느라 새벽 6시에 집에서 출발했고,
오전 11시 30분에 오르기 시작한 곰배령은 왕복 4시간, 총 10.5킬로의 산행으로 기분 좋게 잘 마무리했다.
산에서 내려와 늦은 점심을 먹으니 오후 5시.
체력은 이미 방전되어 다른 여행지를 둘러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이번 여행의 두 번째 목적. 육백마지기에서 별 보기.
남편은 새벽에 육백마지기를 보러 가기 위해 가장 가까운 숙소는 정선읍내라고 했다.
곰배령이 있는 인제에서 정선까지 이동하는데도 두 시간이 넘는 거리였다.
강원도는 도내에서 이동하는 거리도 참, 클래스가 다르구나 생각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숙박지가 많지 않았다.
정선의 모텔에서 쪽잠을 자고 따뜻한 물로 피로한 몸을 씻기만 하면 된다.
두 군데쯤 전화를 돌려보고 빈방이 있는 모텔을 선택했다.
사실 별을 보기 위해서 따라줘야 하는 여건들이 몇 가지 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건 그날의 날씨가 따라줘야 한다.
흐리고 비가 오는 날에 별을 볼 수는 없다.
이건 말 그대로 날씨 운이 따라줘야 하는 일.
그다음은, 달이 밝은 날을 피해야 한다.
상식적으로 그믐 때가 가장 좋겠지만, 달도 뜨고 지는 시각이 있으니 월몰 이후엔 별 보기에 무리가 없다.
우리가 갔던 날은 음력 18일.
달이 반쪽보다 작았지만 월몰 시각을 확인해 보니,
새벽 두 시 반이면 달은 지고 없다.
날은 맑고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으니 별 보기 완벽한 날씨.
그다음은 일출 시간을 고려하면 된다.
일출은 새벽 5시 12분이지만, 시민박명(사물이 시야로 구분되는 시간)은 새벽 4시 20분이었다.
박명 전에 도착해야 깜깜한 하늘에 제대로 별을 볼 수 있다.
남편은 새벽 3시 30분까지는 도착해야 할 것 같다는 의견.
그럼 언제 출발해?
2시 40분에는 출발해야지.
일어나자마자 세수도 하지 말고 나가자.
육백마지기로 오르는 구간은 차로 오르기에 꽤 가파르고 길게 올라간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가려면 시간을 넉넉히 잡는 게 맞겠다.
그럼 알람은 2시 30분에 맞춘다.
허름한 모텔에서 간식으로 저녁 요기를 하고
뜨거운 물에 땀을 씻고 10시 반쯤 잠들었나.
알람이 울리기 전 새벽 2시 10분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여보. 나가자.
눈 뜨자마자 눈곱도 떼지 않고 정선 모텔을 나왔다.
어플로 수면시간을 확인해 보니 실제 3시간 17분 잤다고 한다.
아, 그 와중에 한 가지는 챙겼는데 텀블러에 뜨거운 커피믹스를 두 개 타서 가져왔다.
새벽 2시 반. 텅 빈 정선읍내를 달려 육백마지기로 구불구불 길을 오르는 동안,
우리 뒤로도 차가 한대 더 따라왔다.
참.. 별보겠다는 사람은 우리 많고도 참 많다.
우리가 별을 목적으로 강원도를 찾은 건 이번이 세 번째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모두 여름의 안반데기에서 별을 보았다.
나를 닮았는지 별 보는 걸 좋아하는 딸내미들과 함께해서 더 좋았었지.
첫 번째 안반데기에서는 호기롭게 차박을 했었고,
두 번째에는 가까운 데 숙소를 잡고 새벽에 올라 별을 보았다.
말하자면 별 보기 여행에 있어 우린 유경험자다.
이번에도 사실 육백마지기에서 차박을 할까 잠시 고민도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야영은 금지되어 있다는 소식에 포기했다.
(실상은 많은 차들이 정상에서 차박 중이었다)
그것 말고도 차박이 실제로는 엄청 피곤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새벽 3시 20분. 육백마지기 정상 도착.
별이...
세상에...... 내가 경험한 중 가장 많은 모습으로 하늘에 빼곡하다.
저거 은하수 아니야?
은하수도 여러 갈래로 펼쳐있었다.
현실감이 없을 만큼.
우리 부부는 둘 다 별 사진을 못 담는다.
남들은 폰으로도 별 사진을 잘 찍던데, 우리 폰으로는 아무리 찍어봐도 안 담긴다.
내가 본모습과 사진에 찍힌 모습의 괴리가 너무 커서, 그러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포기했다.
별을 본 내 느낌과 감상을 글로 남기는 편이 나을 것 같아 글로 남겨본다.
갤럭시. 은하계를 내가 발로 디디고 걷는 기분이었다.
무중력이었다면 진짜 그런 걸로 믿어도 될 만큼의 경험이었다.
온전히 깜깜한 가운데 하늘에는 빼곡한 별과 은하수 무리가 가득했으니까.
잠을 물리치고 찾아온 게 전혀 아깝지 않았다.
북두칠성이 평소보다 훨씬 가깝고 크게 천체과학관에서 모형을 보여주듯이 바로 앞에 펼쳐졌다.
100배는 크고 선명한 모습. 손 뻗으면 꼭 닿게 생겼더라.
내 말이 과학적으로 무리가 되더라도 할 수 없다.
그건 그냥 내 느낌과 감상을 적어두는 거니까.
요즘은 오로라를 보고 온 이도, 몽골에 별 여행을 다녀온 이도 흔해졌지만,
나에겐 충분했다. 내가 본 별 풍경이.
내 경험치의 어떤 것과도 비교가 되지 않았으므로.
이때 기온은 13도.
챙겨간 겨울 패딩을 입으니 포근하고 춥지 않은 정도였다.
사위가 조용하고, 차박하고 있는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방해하지 않았다.
풍력발전기만이 바람소리를 내며 깜빡이면서 돌아가고 있다.
귀하게 준비해 간 믹스 커피를 후후 불어 마셨다.
차로 다시 돌아와서 선루프를 열어두고 하늘을 보다 잠이 들었다.
신기하다...라는 말만 반복했지.
일출까지 남은 두 시간쯤, 오히려 이 시간이 꽤 추웠다.
다행히 가져간 핫팩이 있어 뜨끈하니 의지가 되었다.
일출은 정확하게 시간 맞춰 5시 20분에 해가 떴다.
동트기 전의 여명이나 그런 멋짐은 없이, 해만 정직하게 올라오는 일출.
이제 두 번째 여행 목적도 완벽히 달성했으니
남은 체력을 쥐어짜서 어딜 더 가고 싶지가 않다.
다른 여행지를 권하는 남편에게 아니, 그냥 집에 가고 싶어.라고 했다.
5시 반에 출발해서 오전 8시 반 집에 도착.
만 26시간의 여행을 마쳤다.
나에겐 나만의 여행동반자가 있으니 가능한 일이다.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나의 집, 내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니,
불과 몇 시간 전에 보았던 별천지가 다시 내 눈에 펼쳐졌다.
그래 이거면 됐지.
먼 길을 달려가 별을 보고 얻어온 건 내 눈앞에 펼쳐진 은하계를 내가 보고 기억한다는 것이다.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는,
나만의 본 것과 느낀 것을 내 방식으로 기억하고 추억하기 때문이다.
여행이란 단 하나도 똑같지 않은 나만의 추억 구슬을 모으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해왔다.
나만의 추억 구슬들이 모아진 사이에 육백마지기에서 본 별이 반짝, 영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