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no Nov 17. 2023

나를 담는 그릇

가족은 특별해서.

결혼 25년 차.

우와, 정말 오래 함께 살았다.

배우자를 선택하고 결혼을 하는 일이 이렇게까지 인생에 있어 중요한 문제인지 그땐 몰랐다.

(우린 그걸 모르니까 섣불리 결혼을 하고 이 지구상에 인류가 이어지는 것이겠다)


나와 가장 잘 맞는 친구라고 생각해서 함께 살 (엄청난) 결정을 했고,

함께 사는 동안, 보통의 관계와는 다른 관계 맺기를 경험케 하고 수련시키는 사람.

세상에서 제일 미웠던 시간도 1 ts, 너무 미워서 증오했던 시간도 0.5 ts.  

그럼에도 보통의 시간엔 나의 가장 편안한 나의 반려인. 남편이다.


내게는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 잘 섞여있거나 관계를 잘 맺는 일이 숙제라서,

상처받지 않는 만큼의 적당선을 두는 것으로

그것이 가장 현명한 것이라 변명을 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남편과는 그런 식의 현명한 척은 통하지 않는다.

그가 나를 아는 깊이가 있고, 내가 그를 아는 깊이가 있는데 그런 얕은수는 통할 수가 없다.

우린 그냥 가면 없이 상처도 주고받는 사이, 말하자면  이다.


얼마 전에 '사람멀미'라는 단어를 처음 듣고는, 우와 신선하다 생각하고 놀랐다.

국어사전에도 이미 버젓이 있는 단어인 데다, 사람멀미를 해결하는 방안에 대한 글이 있을 만큼

이미 통용되는 말이어서 한번 더 놀랐다.

처음 들었어도 직관적으로 그 단어가 뭘 뜻하는지 우린 다 안다.

"사람사이에서 부대끼며 어지러운 증상"

그 단어를 듣고 나는 깨달았었다.

내게 유일하게 사람멀미에서 제외된 사람이 내 남편이라는 걸.

(특급 칭찬이야. 여보 ^^)


내가 사람들과 관계에서 사람멀미를 느꼈다면, 나는 보통의 경우 회피를 택한다.

멀미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작 할 수 있는 일이 도망치기.

그러지 않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에너지를 쓰는 건 너무(너~~무너~무너~무) 어려우니까.


그렇지만, 남편과의 문제에서는 회피보다는 다른 방법을 찾는다.

나는 노력한다.

'나의 가장 평안한 반려인'을 되찾기 위해 _ 눈치도 살피고, 납작 엎드려도 보고, 화도 내보고.

그게 거리두기이거나 혹시 냉전선언이더라도, 그건 모두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기 위한 '전술'일뿐이다.

나 지금 진짜 화났거든, 나 좀 내버려 둬. 지금은 화해하고 싶지 않아.라는 신호.

혹은, 지금보다 좀 더 달래줘야 내 맘이 풀리겠어.라는 신호.

( 이 신호는 잘 가닿지 않는다, 수신불량이 많이 발생하니 조심. )


있는 그대로의 나를 그 사람이 받아주길 바라면서 살아온 세월이 25년.

내 맘 다 알면서 정말 이러기야?라는 배짱은 아무리 소리 내봐야 통하지 않는다.

세상에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주는 사람은 없더라.


남편은 25년간 나를 담는 그릇이었다.

그 많은 세월 간 내가 어떤 모습이었더라도,

그에게 잘 담길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었지만, 결론은 나를 담아줬다.

나를 좀 더 잘 담아달라고~~!!  소리친 날이 숱한 날들이었는데,

그릇은 스스로 형태를 바꿀 수 없지 않은가!

남편은 내가 담기는 그릇이었던 거구나.


오늘은 우연히 지나던 현자가 내게 찾아왔는가,

내가 그동안 외면했던 깨달음이 찾아와 버렸다.

내가 담기는 그릇엔, 그릇을 탓하기 전에 내가 요령을 찾아야 했던 거였네.

넌 이 부분은 이렇게 생겨서 이런 나를 담기에 좀 어려웠구나. ^^

미안해. 미리 깨닫지 못해서.

이제부턴 내가 조금 더 잘 담겨볼게.

속는 셈 치고 한번 믿어봐~.





물론, 이건 순수한 나만의 입장 표명이고.

(그러니 너무 억울해하지는 말고)

너의 입장에선 모든 게 반대이겠다.

나는 너를 담는 그릇,

너는 내게 담기는 사람.






매거진의 이전글 결핍은 집착을 부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