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국민학교에 입학해 보니 친구들은 대부분 유치원을 다녔었고 피아노 학원도 다녔다 하던데,
우리 집은 그런 학교 이전의 과정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인식조차 하지 않았었다.
학원? 그런 건 우리가 욕심내 볼 세상이 전혀 아니었다.
돈을 내야만 배움을 받는 것은 아무것도.
사정이 그러하니, 물질 어느 것에도 풍요로운 것이 없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식구들은 차례로 상태가 괜찮은 우산을 골라 학교에 갔는데,
막내인 내 차례에 가져갈 우산이 성한 게 있을 리 없었다.
어느 것도 내 몫으로 성한 것이 별로 없었지만, 양말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두 번의 명절에 엄마가 새 양말을 사주었는데, 대부분의 양말은 해지거나 구멍을 메꾼 것들이었다.
그래도 양말은 신발 안에 감출 수 있었다.
그렇지만 찢어지고 나풀대는 우산은 차마 감춰지지 않았다.
가난은 그런 것 같다.
우산이 성한 게 없었는데, 우리 중 누구도 우산을 새로 사달라고 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부끄러웠다.
성치 않은 우산 때문에 나는 비 오는 날엔 학교에 가는 게 싫었다.
"나중에 커서 어른이 되면 나는 좋은 우산을 가질 거야.
그리고 날마다 구멍 나지 않은 양말을 신을 거야."
미래에 대해 가진 욕심이 겨우 우산과 양말이었다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어른이 되어 나는 좋은 우산도 여러 개 가지고 있고
마음만 먹으면 더 좋은 우산도 얼마든지 살 수 있게 되었다.
양말? 그것쯤이야 물론이다.
양말에 대해서라면, 난 손재주가 있는 편이어서 바느질을 아주 잘한다.
그럼에도 나는 양말은 절대 기워 신지 않는다.
양말까지는 기워 신고 싶지 않은 것은 분명 유년의 나의 결핍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물욕이 엄청나거나 행여 물욕을 채울 수 있을 만큼의 재력도 없지만,
내 양말통에 포장도 뜯지 않은 새 양말들이 줄 서 있다는 걸 최근에야 알았다.
우산에 욕심을 내서 한 번, 두 번 새 우산을 사서 쟁이고 나서는
우산에 대해 집착이 더 이상 없어졌다 생각한 적은 있었다.
그런데 내가 아직도 양말을 사 모으고 있었구나...
결핍은 집착을 부른다.
결핍은 비단 양말과 우산의 문제처럼 단순하지 않다.
그러니 결핍은 슬프다.
결핍은 우리의 생애 전반에 걸쳐 집착을 부른다.
그러니 결핍은 생애 전반에 슬픈 멜로디를 BGM으로 깔아 둔다.
내가 간파하고 있는 나의 결핍과 아직도 알아채지 않은 결핍들이 뒤섞여 나를 지금의 어른으로 데려왔을 것이다. 겨우 양말과 우산에 대해서는 꺼내서 말할 수 있지만, 내게는 차마 꺼내서 말하고 싶지 않은 결핍들이 숱하게 있다. 그것들이 내가 배우자를 만나고 선택하는 이유가 되었고, 사람과의 관계를 맺는데 잣대가 되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결핍이(뭐라고) 결국생의 전체를 좌우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