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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o Dec 07. 2023

정체성에 대해 물어본 사람은 니가 처음이야

Childhood에 대해서 물었단 말이지!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기 위해, 해야 할 일을 만들기 위해 최근 전화영어에 도전했다.

필리핀에 있는 1:1 코치와 연결되어, 미리 주어진 topic의 질문들을 숙지하고 정해진 시간 동안 영어로

대화를 주고받는 미션을 스스로 나에게 준 것이다.


주제는 다양하고도 일반적인 것들이었다. 동물이 주제인 날엔 좋아하는 동물을 묻거나 인간이 동물을 기르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지 묻고, 말 그대로 스몰 토크가 가능한 범위의 질문들이었다.

이번 주제는 Childhood. 내 어린 시절에 대해 묻겠단다.

- 네 어린 시절에 가장 즐거웠던 일은 뭐였니?

- 네 어린 시절에 제일 그리운 건 뭐니?

- 행복한 어린 시절에 가장 중요한 건 뭐라고 생각하니?

OMG! 이 질문들에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게 없다.

난 어린 시절에 즐거웠던 일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운 것도 물론 없다. 나 어쩌지?


그냥 어린 시절에 대해 조금 묻겠다는데, 내 정체성을 묻는 것처럼 읽어버린 나는 고민에 빠졌다.

어떤 질문에도 좋았던 걸 떠올려 대답할 수 없었다.

참 난감하네.

정말 친했던 친구도 내 어린 시절에 대해 저렇게 물어본 적이 없었는데,

필리핀 영어메이트가 나에게

갑자기 훅 들어와 버리겠다는 포고를 해버렸다.


지난주 필리핀엔 강진이 있었다. 나의 메이트도 통신상태에 영향을 받았다.

덕분에(?) 전화수업은 연이어 미뤄지고 있었다.

불편한 Childhood의 질문이 계속 나를 붙잡고 있다.

나 왜 어릴 때 즐거운 기억이 없지?

나 어릴 때 어땠다고 말해야 해??


1주일 넘게 Childhood를 붙잡고 있던 끝에, 전화가 왔다.

메이트가 묻는다.

 - 네 어린 시절에 가장 즐거웠던 일은 뭐였니?

- 난 별로 즐거웠던 기억이 없어.(에라. 모르겠다.)

당연히 그녀가 왜냐고 묻는다.

- 별로 행복하지 않았던 거 같아.

난 어릴 때 우울한 아이였어.


오 마이갓.. 이런 식으로 내 정체성을 필리핀 친구에게 고백하는구나.


난 주로 혼자였고, 그래서 항상 심심했던 기억이 있어.

내가 바란 건 외롭지 않고 화목한 가정이었던 거 같애.

우리 집은 가난했어. 그게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


이렇게만 말했는데, 신통방통 그녀는 다 알아들었다.

- 아. 가난해서 너를 돌봐줄 사람이 없었던 거구나.

(난 그렇게 생각했던 적은 없지만 어쩌면 그랬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응, 그랬어.라고 대답했다.

거기에 덧붙어, 그녀도 말했다.

- 나도 어릴 때 부모님이 자주 싸웠어. 그래서 집이 행복하지 않았어.

 그래서 난 집에 있지 않고 친구들을 찾아다녔지. 친구들과 노는 시간이 즐거웠어.


약속된 시간이 끝나자 그녀는 황급히 사라지면서

Bye! 했다.


그랬네. 그녀도 집이 행복하지 않았지만 친구들을 찾아다녔구나.

그래서 그녀는 어린 시절에 즐거운 기억을 친구들과 놀았던 시간으로 떠올렸다.

나는 안 그랬구나. 친구들과 놀았던 시간조차도 내 우울의 색으로 덮어버렸구나.

너와 나는 그렇게 달랐구나.


있지, 메이트야.

나 이런 대화를 누구랑도 해 본 적이 없어.

너는 그렇게 쉽게 툭 던지고 바이~ 하면서 사라졌지만,

그 질문이 나한테 한참 동안 내 어린 시절을 뒤적거리게 만들었고,

짠하고 외로운 어린 나를 떠올렸고, 내 정체성이 그 시절에 있구나... 생각하게 만들었다구!

쿨하게 나타나 쿨하게 퇴장해 버리니, 나도 쿨하게 인정할게.

나 좀 짠한 어린 시절을 보냈어. 내 정체성 말이야.


내 아동기 정체성 때문에 내가 무채색 사춘기를 거쳤고, 이런 성인이 되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긴 했어.

인식했다고 해서 뭔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더라.

한동안은 나를 달래느라 좀 아팠고,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 저편에서는 사랑도 받았다는 것도 알게 되고 그랬어. 결국 지금의 내가 되는 정체성을 가졌지.


나, 그런데.

어릴 때보다는 지금이 훨씬 단단해.

지금은 자주 행복하단다.

지금은 쉽게 행복해질 수 있는 나만의 치트키들도 가지고 있어.

그렇게 생각하니 나 꽤나 잘 자란 거 같애.


미안. 메이트야.

근데 나 저 얘기들은 영어로 말할 자신이 없네. 아직 내가 영어표현이 미숙해서 말이야~




[ 정체감주관적 경험으로서 아동 자신이 세상 안에서 다른 사람들함께 한 개인으로서 존재한다는 자각으로부터 시작된다. 즉 정체감의 형성 과정에서 아동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자신의 소망, 사고, 그리고 외모를 갖고 있다는 자각을 갖는다. ] - 네이버 지식백과



어떤 소망 같은 걸 가질 생각도 하지 못했던.

혼자 놀고 있는 어린 시절의 나를 찾아간다면,

나는 나를 꼭 안아주고 싶다.

그 아이를 혼자 있게 하지 않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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