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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o Jan 18. 2024

탄생설

이름에 관하여


나는 오곡이 풍성하게 결실을 맺는 구월에 태어났어.     

‘가을’이라는 말에 풍성함이 깃들여 있고

그러니 내가 참 좋은 계절에 태어났구나... 나중에야 알게 됐어.

하늘이 높고 파란, 백일홍 꽃이 아직 한창인 시절이 내가 태어난 구월.     

백로 지나,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근사해지는 시간

한낮 볕 그늘로 걸으면 기분이 좋은 때가 내 탄생월이야. 


가을, 좋은 계절에 태어났다 하니 꽤나 괜찮은 탄생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별로 그렇지는 않아.

내 위로 언니가 넷. 

아들 하나 얻길 바라면서 나를 낳았는데, 실망스럽게도 내가 다섯 번째 딸로 태어났다지.

실망을 준 존재.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환영받을 수 없었어.

딸이라서 실망이었다는 걸 숨기지 않고 당당히 말하던 시절이었으니까,

참, 잔인한 시대였어.


내 이름 '선오'에는 내 탄생설이 그대로 들어있어.

돌림자 '선'에 고민 없이 붙인 다섯'오'. 

다섯 번째 딸이라고 내던진 작명이야. 


일련의 저 사실들은 내 자존감에 꽤나 영향을 미쳤던가봐. 

당연한 일이겠지.

주눅은 내 기본값이었어. 

주눅이라는 게 한 사람의 시야도 가둬놓는 건가?

난 세상에 호기심이랄 게 별반 없는 채로 성인이 되었어.

돌아보면 그 부분이 젤로 안타까워.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말이지,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야. 

툭 던져 만들어준 내 이름 '선오'까지도 지금은 꽤나 좋아하게 되었다는 고백이야. 


선오. 나랑 꽤나 어울리는 이름 같아.

한 세상에 하나의 생명이 태어난 조우에 환영이 없었더라도,

이름을 지어줬을 때의 성의 같은 거 없었더라도, 

친구들이 종종 헷갈려 '선호'라거나 '선우'라고 불렀더라도.

아니면 종종 김선오 군!으로 호명되었더라도.

나와 관계 맺는 사람들이 온기를 담아 불러주는 내 이름을 들으면서

나는 자라났어.


선오~~ 선오씨~ 선오야... 불러주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개미만큼 눈곱만큼 자라나고,  어느땐 한 뼘 자라나다가,

사랑 받거나 인정 받는 경험에 옥수수만큼 쑤욱 자라기도 했어. 

불리는 내 이름을 들으며 내 이름을 좋아하게 되었어.

불러주는 내 이름들에 나는 자라났어. 


자라난 그 만큼의 힘으로 나를 사랑하는 씨앗을 가지게 된 것 같아.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잖아.

상처를 품고 있거나 스스로의 치부를 아는 사람은 

스스로를 사랑하는 용기를 가지기 어려워.

자신을 사랑할 에너지를 품기가 어렵지. 

나는 내 이름을 따숩게 불러주는 사람들에게서 나를 사랑해도 되는 힘을 얻었어.


고맙습니다. 여러분. 

내 이름을 불러주고 호의로 나와 이 세상에서 만났던 모든 분들.

내 이름을 불러 온기를 주셨던 모든 사람들. 친구들. 

사랑한다고 말해줬던 사람들.

그 사랑이 비로소 나를 사랑하게 해줬어요. 

거울에 선 나 자신도 올바로 마주하지 못하던 한 사람을 살려냈어요. 






브런치에 처음 글을 올리던 때,

작명을 무얼로 써야할지 고민이 많았다.

되지도 않는 무의미한 말도 여러번 올렸었고,

있어보이고 싶은 필명도 올렸다가 지우길 반복했다.


김선오. 라고 써놓고 나를 드러내는 나를 보고 놀랐다.

그런데 그 이름이 가장 편안했다.

내 이름을 내가 꽤 좋아하는구나!

나 나를 사랑하는가봐~


브런치에 글을 쓰는 일은 자꾸 나를 돌아보고 새기는 일들이다.

오늘도 "김선오"를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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