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인연이 스치며 지나가는 게 삶이라지만, 유난히 욕심을 내게 되는 인연이 있어. 욕심을 내다 오히려 잃게 될까 저어 되는 마음까지 가지게 되는 그런 사람. 사람을 쉽게 사귀지 못하는 나에겐 한 사람을 알아가는 것이 그 사람을 사랑하는 일과도 같지.
열두 살 열세 살 무렵의 네가 엄마와 떨어져 지내게 되었고, 그리움에 한밤에 달려간 너를 엄마가 외면하고 돌려보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어른이 되는 동안 너는 얼마나 잘 덜어내고 잘 삭였던지, 남의 얘기같이 무덤덤하게 말하는 너의 말에 듣는 내가 목이 메었었지.
그런 생각을 해. 시간을 돌려 가 볼 수 있다면, 엄마 품에 안기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서는 그 밤의 너를 안아주고 싶구나. 그래서 이 생각을 해. 나는 너를 사랑하는구나.
편린이라고 불릴만한 오래된 기억들이 있어. 뜨문뜨문 앞뒤 없는 낱장으로 남은 기억의 편린들이, 어쩌면 그 사람의 정체성이 아닐까 헤아리게 되지. 앞뒤는 사라졌지만 그 장면은 기억해야 할 이유가 있어서 내가 기억해 둔 것. 보통 치매를 겪는 어른들이 돌아가는 시간도 그런 기억 속이 아닌가 싶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다 잃고도 그에게는 남아버린 중요한 시간.
나의 편린은 주로 어린 시절의 기억들인데, 아직 초등학교에도 가지 않았던 나는 언제나 심심했어. 언니들은 모두 학교에 가버린 시간이고, 집에 남은 나는 햇볕과 놀거나 개미와 놀고 있어. 기억 속의 나는 혼자 남겨졌고 주로 외로웠던 것 같아.
그 기억을 떠올릴 때면, 어린 나를 찾아가 친구가 되어주고 싶어. 나는 아직도 누군가의 친구가 되는 법을 잘 모르지만, 그래도 어린 내가 많이 외롭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 애의 친구 정도는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그 애의 옆에는 있어주면 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걸 그렇게 알게 되는 것 같아. 그 사람의 지금 말고 먼 과거의 어느 시간에 쓸쓸한 그를 알게 되고, 그를 헤아려주고 싶은 마음. 드라마 속 초능력자가 된 듯 과거의 그 사람을 먼발치에서 바라봐주고 싶어 져. 오래전 너의 아픔을 내가 안다. 그 아픔을 가진 너를 내가 안다. 그러니 넌 혼자가 아니다. 아...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는구나 알게 되는 거지.
사랑한다는 말을 대신하는 말들이 있지. 밥은 먹었니? 자꾸 묻고 너의 사소한 하루를 궁금해하거나, 긴 밤 편안한 잠에 들길 바라는 마음을 전하는 것. 널 응원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
너의 달콤한 시간, 씁쓸한 시간, 외로운 시간 모두 나와 가깝길 바라지.
그중에서도 지난 시간의 너를 찾아가 안아주고 싶은 내 마음이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어.
너를 알기 전 너의 쓸쓸함을 아파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오래된 너의 아픔이 오늘의 네게 씁쓸한 표정을 가지고 왔다는 걸 아는 게 사랑이라고.
그러니, 오늘 너를 찾아가 안아주려고 해. 우리 오늘을 안고 가벼워지자. 오늘의 사랑을 훗날로 미루지 말고, 오늘의 사랑을 말해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