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나의 잡념도
일이 있어 낯선 골목길 계단을 지나가는데 계단 양 끝에 쓰레기들이 널려 있었다. 슬쩍 봐도 쌓인지 오래된 쓰레기들이었다. 계단 옆에는 다세대 주택으로 들어가는 문도 있었다. 이곳에 거주하시는 분은 정말 싫겠다. 내 집 앞이지만 내가 버린 쓰레기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치우지도 않고 못 본 척 생활하고 있는 그의 삶은 또 얼마나 고된 것일까. 이방인인 나 역시 잡념만 떠올리며 쓰레기를 뒤로 한 채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일주일 뒤 우연히 근처에 약속이 생겨 이 계단을 또 지나게 되었다. 그때 할아버지 한 분께서 종량제 봉투와 빗자루, 쓰레받기를 들고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를 지나쳐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혼잣말이라고 하기엔 너무 큰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어후, 한 시간이나 걸렸어.” 내게 하는 말 같아 계단을 내려가려다 말고 몸을 돌려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일 년 동안이나 이 상태였잖아. 아무도 안 치우더라고”
그 말을 듣고 계단을 내려다보니 과연 말끔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다. 반가운 맘에 아는 척을 해 드렸다.
“맞아요. 여기 정말 더러웠어요.”
이게 시작이었다. 할아버지는 본인의 업적을 누군가에게 꼭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인적 없는 골목에 마침 '누군가'가 이 길을 지나갔고, 마침 이 '누군가'가 지난 계단의 상태를 알고 있었으며, 마침 이 '누군가'가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어줬으니, 이건 기회였다.
”갑자기 통풍으로 몸이 움직이질 않아 병원을 찾았는데 수술을 해야 한대. 그래서 수술을 했어. 그러고 나니 움직일 수 있는 게 축복이더라. 내가 지금 여든이 다 되었는데 말이야. 나이가 드니 몸이 여기저기 다 아파. 퇴원하고 나니 몸을 움직이고 싶더라고. 그래서 이 계단을 청소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 “
이야기의 기승전결이 너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간간이 추임새를 넣으며 호응해 드렸다. 청소 이야기가 다 끝났으니 난 내 갈 길을 가면 되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야기는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노령의 형님 이야기로 넘어왔는데, 요상하게 빈틈없이 이어져서 말을 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당진에 사시는 94세의 형님 이야기로 다시 시작해 조카 이야기, (그 조카가 결혼을 한 건지 모르겠지만) 장소는 어느새 평택으로 넘어가 그곳의 으리으리한 예식장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 (언제까지 이 이야기를 들어야 할지 머리를 굴리느라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음을 밝힌다.) 그 사이 골목을 지나가는 행인 한 분이 싸우듯 큰 목소리로 말씀하시는 할아버지가 나를 향해 화를 내고 있는 건가 싶어 힐끗 보고 지나갔다. 아니면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 대한 호기심이었을까.
나는 반복해서 계단을 내려다보며 호시탐탐 말을 끊을 기회를 노렸지만 실패했다. 결국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슬쩍 시간을 확인하는 연기를 선보였다.
“가아죠? ”
(이 분이 너무 친근하고 자연스럽게 말씀하셔서 말씀 내내 반말을 하셨는지 존댓말을 하셨는지 기억도 안 난다. 하지만 ‘가야죠’는 너무 기다렸던 말이라 존댓말이었음을 분명히 기억한다.)
“아 네네”
“그럼 가요. 가”
“네. 안녕히 계세요.”
계단을 내려가는데 다시 뒤통수에 대고 청소 소감에 관한 말씀을 뭐라 뭐라 하셔서
“어후 진짜 청소 깨끗하게 하셨네요!”라고 다시 한번 칭찬해 드리고 후다닥 계단을 내려왔다.
나도 나이가 들면 이렇게 아무나 붙잡고 인생이야기를 하게 될까? 또 다른 잡념이 떠올랐다. 요상한 계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