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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치료법

06 할아버지의 치료법

by 김호진

신작로를 지나 방천길로 들어서면 칼바람이 앞을 막았다. 차고 거세게 몰아치는 북풍에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아이들은 얼굴이 시려 몸을 옆으로 하고 총총 뛰어갔다. 구멍이 숭숭 난 벙어리장갑으로는 손 시림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래도 우리는 썰매를 들고 얼음판 위로 달려갔다.

'쨍' 하고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가 날카롭다.

논두렁에는 벌써 동네 형들이 불을 피우고 둘러서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낮 동안에는 썰매 타기와 연날리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종종 연 싸움도 즐겼다.

날이 어두워지면 호롱불 밑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실타래 놀이나 김치서리로 동네 밤길을 서성이다가 어른들에게 붙잡혀 꾸중이라도 들은 날에는 놀이 대신에 이불속에서 무시무시한 귀신 이야기로 긴 겨울밤을 보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구봉산 기슭에 진달래꽃이 하나둘씩 피어나기 시작한다. 저녁상에 올라오는 된장찌개에 냉이와 다래가 보이기 시작한다. 봄은 잊지 않고 따스한 바람과 눈 녹은 대지를 데리고 찾아왔다. 우리 마을도 빨래터 빙판이 벌써 사라졌고 길가에는 연두색 새싹들이 뾰족하게 입을 내밀고 있었다.


따스한 봄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던 어느 날 신작로에서 장에 갔다 오는 구루마를 만났다. 우리는 구루마를 따라 동네로 마을 골목길로 들어갔다. 온갖 물건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5일장이 되면 어김없이 소구루마를 끌고 장에 가는 아저씨가 있었다. 아저씨는 동네 사람들의 부탁을 받아서 물건을 팔거나 살 물건들을 주문을 받아 약간의 품삯을 받고 일을 처리해 주었다.


며칠 전부터 할아버지는 마당 한 켠에 돼지우리를 만들었다. 시멘트 블록으로 울타리를 만들고 지붕은 낡은 양철을 덮었다. 나는 시멘트 블록을 나르면서 할아버지 일을 거들었다.



할아버지께서 갑자기 돼지를 기르겠다고 한 것은 올 가을에 큰 할머니의 회갑 잔치 때문이라고 했다. 할아버지께서는 부조물품으로 돼지를 선택한 것이다. 친척 회갑잔치에 하얀 고무신이나 버선 같은 것을 가져가는 것은 몇 번 보았다.



구루마가 우리 집으로 향하는 것으로 보아 새끼돼지가 나무 상자 안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소구루마가 마당에 들어서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뜰에 앉아 있다가 일어섰다. 새끼돼지가 갇혀 있는 나무통을 내리자 쾍 쾍 소리를 질렀다. 새로 지은 우리 안으로 가져 나무통을 열었다. 툭 튀어나온 주둥이가 불그스름하고 콧구멍 두 개 유난히 커 보였다. 까만 털이 꼬리까지 나 있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우선 세 마리를 한 우리에 넣자고 했다. 몸이 커지면 우리마다 한 마리씩 넣어 기르면 된다고 하셨다.

저녁을 먹으면서 할아버지께서

"이제 내일부터 돼지를 잘 돌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돼지풀 베어 오기와 돼지 밥 주기를 맡아달라고 하셨다.

"네 할아버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 있게 대답을 하고 걱정 말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어떤 풀을 어디에서 베어 와야 하는지 몰랐다. 소는 산에 데리고 가서 아무 곳이나 풀어놓으면 알아서 뜯어먹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웃으시면서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셨다. 돼지풀은 방천둑에 많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돼지는 뱀이나 개구리도 잘 먹는다고 했다. 나는 개구리는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할머니께서는 남은 음식물을 바가지에 담아 뜰에 내놓겠다고 했다. 음식물에 등겨를 물과 함께 섞어 주면 돼지가 좋아할 것이라고 했다.

돼지는 정말 온갖 것을 다 잘 먹었다.


남은 음식물과 등겨를 물과 함께 부어 주면 죽통에 코를 들이박고 방울방울 물방을 뽀로록 거리면 순식간에 빈 죽통을 만들었다. 풀어 베어 던져주면 쩝쩝 거리며 게글스럽게 먹어치웠다. 풀을 베면서 잡은 개구리도 한 입에 꿀꺽 해 버리고 '더 없는가요'라고 말하는 듯이 까만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돼지는 점점 몸집이 커져서 돼지우리마다 한 마리씩 방을 내주었다. 하루에 두 번씩 돼지풀 베기와 개구리 잡이 하느라 들판으로 나갔다. 망태기에 풀이 가득 차면 개구리를 잡았다.

돼지밥을 주면서 돼지와 친해졌다. 우리 앞에서 돼지를 보고 있는 시간도 많아졌다. 내가 가까이 가면 돼지는 냅다 달려와 킁킁거리기도 하고 꿀꿀 거리며 반겼다.

돼지는 늘 배가 고팠다.

주는 대로 먹어 치웠다.

집안에서 돼지에게 줄 음식이 많지 않았다. 매일 딱 두 번만 주었다. 개구리는 간식이었다.

돼지 똥을 치우기 날이면 나는 삽을 들고 돼지우리 안으로 들어갔다. 돼지는 냄새를 맡느라 킁킁 거리며 내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마른 짚을 깔아주면 짚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커다란 배는 거친 숨소리와 함께 쉴 새 없이 오르내렸다.


햇볕이 뜰을 지나 마루까지 올라왔다. 마루 끝에 앉아 하늘을 보았다. 하늘 높이 매 한 마리가 빙빙 돌고 있었다. 마당 닭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한가롭게 먹이를 찾아 양발로 땅을 파 헤치거나 뭔가를 계속 쪼아 먹고 있었다.

오늘은 사랑방 손님이 없다. 이제 농사철이라 모두 바쁘다. 그때 사랑방 마루 쪽에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약간 걱정이 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조용히 말씀하셨다.


"마을을 지나 냇가둑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포도밭이 나올 거야. 포도를 좀 사오거라".


내 손에 20원을 쥐어 주었다. 포도라는 것을 본 적도 먹어 본 적은 없었다. 이런 일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을 사 먹는 것으로 돈을 써 본 적이 없었다. 20원은 처음 만져 보는 거금이었다. 한참을 뛰고 걸었다. 원두박에 누워있는 주인을 깨워 돈을 내밀었다.


헐레벌떡 집 마당으로 들어서자 할아버지는 사랑방 마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마루에 앉으라고 하고서는 포도를 먹자고 했다. 껍질은 바가지에 잘 모으라고 했다. 할아버지께서도 드시라고 했지만 몇 개만 먹었다. 처음 먹어보는 포도는 달콤함 포도알에서 터져 나오는 물이 입안에서 춤을 추다가 미끌거리는 포도알과 함께 목구멍을 즐겁게 했다.


한참을 정신없이 먹고 있는데 할아버지께서 말문을 여셨다.

"어제부터 돼지똥이 이상하더니 오늘 아침부터 설사를 하고 있구나"

잘 키워서 큰집 잔칫날 드려야 하는데 걱정이 생기고 말았다. 할아버지는 동네 돼지 키우는 말린 약초를 구해 놓으시고는 잘 먹일 수 방법을 찾다가 포도껍질을 생각해 냈다고 했다. 강제로 먹이는 것보다 훨씬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

지난해 내가 목이 몹시 아플 때 큰집 할머니께서 뱀알을 구워 만든 회색 가루를 입안에 불어넣어 주셨다. 그다음 날 목의 통증은 사라지고 없었다. 특별한 가루로 내 목의 통증이 사라졌듯이 돼지도 약초를 먹고 설사병이 나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께서는 포도 껍질에 마른 약초를 손으로 비벼 잘게 만들었다. 포도껍질에 약초를 조심스럽게 한 알 한 알 집어넣었다. 할아버지와 나는 약초가 든 포도 껍질을 들고 돼지우리로 갔다. 돼지는 약초가 든 포도 껍질을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할아버지께서는 내 뒤에 서서 포도껍질을 먹는 돼지를 유심히 바라보고 계셨다. 다음 날 돼지들은 분홍색 코를 우리 밖에 내놓고 배 고프다고 소리 지르고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큰 일을 해냈다고 칭찬해 주셨다. 돼지는 더 이상 설사는 하는 않았다. 잘 먹고 몸은 날로 커져갔다. 돼지가 커지고 날이 갈수록 돼지가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내년 봄이 되면 할아버지 돼지 중에서 두 마리는 네 다리가 묶인 채 소리 내어 울부짖으며 집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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