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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 음식

09 제사 음식

by 김호진

새벽이 밝아옴을 알리는 수탉의 울음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우두머리 수탉은 무리에서 가장 먼저 소리를 낸다. 목을 길게 뽑고 선홍색 벼슬을 꼿꼿하게 세우고 자신이 가장 강한 존재임을 과시한다. 왕수탉의 울음소리가 끝나면 다른 수탉과 암탉도 소리를 내고 하루를 준비한다.


늘 수탉의 울음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시는 할머니께서는 아침부터 분주하다. 오늘은 기제사날이다. 할아버지의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날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어제부터 제사상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금치, 도라지, 콩나물을 준비하고 미역은 기름에 틔기고 김은 짚불에 구워 참기름을 바르고 소금을 살짝 뿌렸다. 오늘은 파, 우엉, 고구마, 두부 전과 조기 굽기와 돼지고기를 삶기, 탕국, 각종 나물 무침 준비를 해야 한다.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과일과 밤, 대추는 할아버지께서 구해 오셨다. 밤을 깎는 일은 꼭 할아버지께서 하셨다. 할아버지께서는 밤을 하얗고 보기 좋게 깎았다.

나는 다락방에 올라갔다. 제기로 사용하는 나무 그릇과 지난 명절에 쓰고 남은 초와 향 봉투를 찾고 있었다. 다락방은 천장 가까이 문이 있었고 빛이 들어오지 않아 컴컴했다. 손을 더듬어 지난번 제사에 사용했던 타다만 초와 향 봉지를 먼저 내렸다. 언젠가는 다락에 들어가 촛불을 켜고 샅샅이 살펴보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각종 보물이 있을 것만 같고 맛난 꿀이라도 나올 것만 같았다. 어쩌면 할머니께서 꼭꼭 숨겨 놓은 비밀이 있을지도 몰랐다.


제기는 무거워 내릴 수 없었다. 할아버지께서 병풍을 가지고 방 안으로 들어오셔서 제기를 꺼내 주셨다. 제기를 담은 망태주머니를 내려놓고 잘 다듬어진 제기를 하나하나 펼쳐 놓으면서 할아버지께서는 말씀하셨다.

"큰 집 할아버지께서 직접 나무를 깎아 만들었단다."

큰 할아버지께서는 젊을 때부터 몸이 약해 들일은 못하지만 손재주는 마을에서 알아주었다고 했다.


부엌에서는 전 부치는 소리와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나는 할아버지께 함께 부엌에 가 보자고 했다. 할아버지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손사래를 치시고는 얼른 할머니께 가 보라고 했다. 할머니께서는 짚불을 피우면서 전을 부치고 탕국도 끓이고 계셨다. 짚불은 내가 피우겠다고 했다. 할머니는 그제야 뒤집어 놓은 솥뚜껑에 콩기름을 붓고 깊게 숨을 내 쉬면서 바닥에 앉으셨다.


마지막으로 하얀 쌀밥을 하면 된다. 보리밥이 아닌 새하얀 쌀밥은 제삿날이나 명절에만 먹을 수 있었다. 저녁때가 되면 큰 집 할머니께서 오셔서 제사 준비를 도와주셨다. 큰 집 할머니께서는 마당에 들어서면서 늘 내 이름을 먼저 불렀다.

"우리 애기 어디 있나"하고 불렀다.

이가 빠져 오목해진 볼과 오므라진 입을 크게 벌리고 환하게 웃으며 내 볼을 어루만졌다. 큰 집 할머니께서는 집안일에 대해 훤하게 꿰뚫고 계셔서 할머니께서 묻는 것에 대해 즉시 방법을 알려 주시거나 직접 일을 해 나갔다. 오늘도 준비된 음식을 봐주시고 가져온 곶감을 제기에 올려 주셨다.

밤이 깊어지면 할아버지께서 병풍을 설치하고 큰 상을 펼쳤다. 지방을 쓰고 제사상에 음식을 놓는 것은 전적으로 할아버지 몫이었다. 음식마다 놓이는 자리가 정해져 있었다. 할아버지께서는 나에게 제사 지내는 법을 알려주려고 천천히 해 나갔다. 중간에 설명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과일 놓는 법과 밥과 국의 위치 등 모든 것을 알려주려고 했지만 나는 매번 처음 하는 것처럼 낯설었다. 절을 몇 번 올리는지 언제 술잔을 비우고 채우는지 알지 못했다. 또 제사 음식은 고춧가루나 마늘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도 말씀해 주셨다. 양념의 매운맛이나 향이 조상의 영혼을 쫓아내기 때문이라고 했다. 팥이 들어간 음식과 복숭아도 마찬가지라고 하셨다.


큰 집 할아버지와 할아버지 사촌 형제 두 분이 오시면 제사는 시작되었다.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쓰는 사람은 큰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였다. 할머니께서는 할아버지의 말에 따라 움직였다. 큰 집 할아버지께서 제일 큰 어른이라서 진행을 해 나갔다. 엎드렸다가 일어설 때 '에헴'하는 소리가 나야 일어서야 했다.

저번 추석날에 큰 집 육촌 형제들과 함께 장난으로 '에헴'했다가 큰 집 할아버지께 혼난 일이 생각났다. 그때는 너무 웃음이 나와 참을 수 없어 모두 배를 잡고 웃었지만 어른들은 웃지도 못하고 큰 집할아버지 눈치만 보고 있었다.

제사를 올리고 나면 큰 할아버지와 큰 할머니를 비롯하여 참석한 할아버지 사촌 형제들 몇 분과 함께 제사 음식으로 밥을 비벼 먹었다. 나는 탕국을 좋아했다. 할머니 탕국은 맛이 일품이어서 모두 맛있다고 했다.

모두 밥을 먹을 때 할머니는 더 바빴다. 가까운 친척 중에서 할아버지 보다 윗 분이 계시면 음식을 나누어 작은 상을 만들어 집까지 가져다 드렸다. 어두운 골목길을 머리에 상을 이고도 할머니께서는 금방 일을 끝내고 오셨다. 다음 날 아침에는 옆집으로 음식을 조금씩 나누어 주었다. 주로 담을 너머 주었다. 생선조기 같은 경우는 여러 조각으로 잘라야 그나마 나눌 수 있었다. 제사 음식이 그렇게 풍족한 것도 아닌데 할머니께서는 매번 그렇게 하셨다.

할머니께서는 "콩 한 조각도 나누어 먹는 것이란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친척들과 이웃들에게 좋은 것이 생기면 나누었다.


할아버지께서도 뭔가 조그마한 것이라고 좋은 물건이나 좋은 음식이 생기면 무엇보다 먼저 친척들과 이웃들과 함께 나누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되고 정이 두터워진다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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