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작두 펌프
뜨거운 여름날에 물 한 두레박이면 등목을 할 수 있다. 두레박을 텀벙 던져 넣고 두레박에 물이 차면 밧줄을 잡아 올리면 되는데 나는 키가 아직 모자라 우물 안으로 두레박을 던질 수 없었다. 할아버지가 길어 준 두레박 물로 할아버지를 먼저 해 드리고 사랑방으로 간 뒤에 할머니도 윗 저고리를 벗었다. 깊은 곳에서 갓 길어 올린 물이 할머니 등을 놀라게 했다.
추운 겨울날이면 두레박을 샘 아래로 던져 넣고 물이 차기를 기다리다 줄을 잡고 올릴 때면 이미 손은 감각이 없다. 쩍쩍 얼음이 얼어붙은 줄에 내 손도 달라붙는다. 보다 못한 할아버지는 작두 펌프를 사기 위해 층층이 나무판자로 올려져 있는 두지문을 활짝 열고 나락을 몇 가마니 퍼 담았다. 그곳은 할머니와 함께 땅을 일궈 수확한 곡식이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피와 땀으로 만든 나락이 쌓여 있었다.
가마니를 벌리라 하고 할아버지는 묵묵히 가마니에 나락을 퍼 담았다. 먼지가 퍽퍽 일어나 코가 막히고 눈을 뜰 수 없었지만 나는 참았다. 할머니도 부엌 앞에 서 계셨다. 제일 좋아해야 할 할머니도 말없이 시선을 나락에 두었지만 제법 자란 송아지를 팔러 시장으로 떠나던 날 같이 양 두 손을 앞섶에 두고 쥐고 조용히 서 계셨다.
그렇게 우리 집은 우물에 쇠 파이프를 연결한 작두펌프가 있는 집이 되었다. 동네에서 공동 우물을 사용하지 않고 자체 우물을 가진 집은 드물었다.
어느 추운 겨울 아침이었다. 할머니께서 언 손을 이불속에 넣으시며 어젯밤에 작두펌프 물 빼는 것을 깜빡했다고 했다. 나는 이불속에서 빠져나와 옷을 입었다. 작두펌프는 꽁꽁 얼어붙어서 꼼짝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할아버지를 찾았다. 사랑방 앞으로 갔다. 혹시 할머니께 불똥이 튈까 걱정이 되었지만 할아버지께 사실을 밝혔다. 방안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잠시 후 할아버지가 사랑방 문을 열었다. 두꺼운 솜옷을 입고 나오셨다. 할아버지는 침착했고 당황하지 않았다. 잠시 작두펌프와 우물을 둘러보고는 들어가셨다. 나는 이 일을 어찌하나 가슴이 쿵쿵 뛰었지만 할아버지께서는 느긋하게 해가 충천에 뜨기를 기다릴 뿐 아무 말이 없고 행동을 취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긴 아침 시간이 지나고 할아버지와 나는 반나절이 되었을 무렵 작업을 시작했다. 먼저 나에게 명령을 내렸다. 앙지를 가지고 오라 했다. 앙지는 방앗간에서 나락을 기계에 넣으면 쌀과 분리되어 방앗간 뒤로 나오는 나락 껍질이었다. 방앗간 뒤에서 먼지와 함께 날려온 앙지를 먼지를 뒤집어써 가면 가마니에 퍼 담아 가지고 왔던 것이다.
나락 두지 옆 개방형 창고에서 앙지 가마니를 열고 소쿠리에 퍼 담아 날랐다. 할아버지께서는 마른 짚으로 펌프 아래 쇠파이프관을 둘러쌌다. 가져온 앙지를 짚 위에 부었다. 짚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수북하세 쌓였다. 얼마나 쌓아야 하는지 할아버지께서는 정답을 말해 주지 않았다. 평소 말씀을 잘하지 않는 것은 알지만 오늘 나도 애가 탔다. 빨리 녹여야 할머니께서 아침밥을 준비할 수 있는데.
드디어 할아버지께서는 부드러운 짚에 불을 지피더니 쌓인 앙지 속을 헤치고 짚불을 넣고 조심스럽게 앙지를 덮어나갔다. 나도 쪼그리고 앉아 양손으로 앙지를 듬뿍 담아 덮었다. 그리고 풍무를 가지고 와서 앙지 안쪽으로 밀어 넣어 돌렸다. 불이 조금씩 피어나 연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께서 풍무는 그만해도 된다고 하셨다. 너무 센 불이 일어나면 금방 다 타버린다고 했다. 천천히 타면서 작두와 긴 쇠파이프 속의 얼음을 모두 녹여야 한다고 했다.
작두펌프를 하기 전에도 우물 안은 볼 수 없었다. 어쩌면 할아버지께서는 나를 위해 우물가를 높이 쌓았는지도 모른다. 물을 길을 때는 두레박을 던져 넣고 줄을 당겼었다. 두레박이 첨벙하고 떨어질 때 경쾌한 소리는 이제 들을 수 없지만 작두 펌프는 물을 퍼 올리는데 신기한 물건이었다. 몇 번 펌프질 하면 양동이에 물이 가득 찼다.
점심때가 되어 갈 무렵 작두펌프와 연결된 긴 쇠관에서 '꺼억'하는 소리가 들렸다. 막혔던 파이프가 뚫리는 소리가 분명했다. 나는 수시로 확인하러 가 보았다. 연기가 살살 피어오르면서 앙지는 서서히 열을 내기 시작했다. 내가 달려갔을 때는 앙지가 거의 다 타고 거멓게 재가 되어 가는 중이었다. 작두에 물을 붓고 펌프질을 해 보았다. 물은 쇠파이프를 따라 올라 콸콸 쏟아져 나왔다. 할머니는 부엌에서 쌀 씻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나는 아직 불꽃이 살아있는 재를 마당으로 옮겨 놓고 물을 뿌렸다. 허연 김이 무럭무럭 솟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