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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진 Sep 15. 2023

땡볕에 지렁이

산사에서 180일

땡볕으로 나온 지렁이



오래전의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백인들이 탐욕스럽고 거칠고 무자비하게 대륙을 침입하기 전의 일이다. 지금의 아메리카 대륙은 신이 선물한 평화의 땅이었다. 그곳에서 원주민들은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을 몰랐다. 언제나 필요한 만큼만 자연에서 먹을 것을 취했다. 자연이 주는 선물에 감사히 표시로 숲과 대지의 정령께 기도했다. 탐욕과 비교, 질투, 불만이 없는 삶을 살았다. 소유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자연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었다. 자연은 그저 모든 것을 베풀어 주는 존재였다. 그래서 늘 소중하게 여기고 자연의  품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느끼며 살았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삶의 방식 중에서 자연을 대하는 태도는 지금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다. 여전히 자연은 아낌없이 내어주지만 인간은 자연을 파헤치고 탐욕스럽게 소유하려만 하는 것은 아닌지.



숲으로 들어가는 산책 길을 가지 전에 시멘트 포장길과 황톳길을 잠시 걸어야 했다. 황금빛 햇살은 나뭇잎 사이에서 춤추고 산들바람은 부드럽게 귓불을 만지며 지나갔다. 태양은 여름의 마지막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오후의 황톳길은 눈부시게 빛나고 뜨겁게 달궈지고 있었다. 바짝 마른 황톳길 위에 뭔가 꿈틀거리며 느릿느릿 기어가는 물체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굵고 긴 지렁이 한 마리가 길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산 자락 숲에서 나와 계곡이 있는 숲 쪽으로 가는 것 같았다. 습하고 어두운 땅 속에서 사는 지렁이가 뜨거운 태양 아래로 자신의 몸을 노출하였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할 정도로 급박한 일이거나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왜 죽음의 여행을 시작했을까. 풀숲 땅속에서 편안하게 살 수 있을 텐데. 어쩌면 지렁이에게는 새로운 삶을 향한 도전이었는지 모른다. 미지의 땅, 축복받은 땅을 향하여 목숨을 건 지난한 고행의 길을 선택하였는지 모른다. 


지렁이는 축축하고 물기가 많은 습한 땅속에서 사는 동물이다. 햇빛을 온몸으로 받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모르지 않을 것이다. 가는 길은 개미떼와 각종 곤충이나 벌레들이 노리고 있는데도 말이다. 



1시간 정도 산책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주위를 살폈으나 지렁이는 길을 무사히 건넜는지 보이지 않았다. 지렁이가 살았다는 흔적은 있었다. 가늘게 흙이 패인 자리가 길게 계곡 쪽 길섶으로 나 있었다. 훗날 자신의 용기와 도전하는 삶이 자손들에게 유전자로 전해져 척박한 환경에서도 살아가는 종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잠시 길을 멈추고 길섶을 바라보았다. 





'티베트 7년'이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세계는 2차 대전으로 지구의 많은 곳에서 살상과 파괴가 일어나고 있을 때였다. 독일 산악인으로 나오는 주인공이 에베레스트 인근 산악 등반에 실패하고 길을 잃고 헤매다 우여곡절 끝에 티베트 땅에 이르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갈 경비는커녕 당장 먹을 양식도 없어 걸인이 되어갔다. 그러다 우연히 서양 문물에 호기심 많은 어린 티베트 스님과 친구처럼 지내게 되었다. 그 어린 스님은 선택받은 스님이었다. 어느 날 어린 스님은 영화에 매료되어 영화관을 만들어 달라고 한다. 주인공은 공사를 시작했지만 현지인 인부들이 자주 공사를 중단하고 모여들어 수근 되는 광경을 보았다. 한 번은 인부들에게 다가가서 문제를 살펴보니 공사장에 지렁이가 나왔다는 것이다. 지렁이가 땅 속에서 나오기 때문에 공사가 중지되었다는 것이다. 불교 문화권에 있던 현지 인부들은 스승님의 가르침에 따라 지렁이가 살고 있는 곳을 파 헤칠 수 없다는 것이다. 며칠 고민하던 주인공은 문제를 해결한다. 지렁이를 살 수 있는 적합한 환경을 만들어 옮기는 작업을 하였다. 인부들과 함께 지렁이를 소중하게 다루었다. 함께 모여서 좋은 흙으로 덮어주고 촉촉하게 물을 주어 지렁이가 놀라지 않게 하는 장면을 보았다. 


그들은 지렁이가 돌아가신 고모일지 할머니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문명사회의 이기를 보여주고 싶었던 주인공은 현지인들에게서 큰 깨달음을 갖게 된 것이다. 윤회설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하잘 것 없어 보였던 생명체라도 그들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다. 지렁이 입장에서는 침입자요, 살상이요, 폭력이었던 것이다. 

자연과 문명이 조화를 이루면서도 훌륭한 문명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큰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하늘과 대지에 있는 모든 것들은 이용하고 가치가 없어지면 버려도 되는 존재, 문명의 발전에 방해가 된다면 파헤치고 파괴해도 되는 대상에서 이제는 우리도 대자연을 함께 지키고 공유하면서 살아가야 할 존재들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숲은 살아 있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숲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하늘과 대지에 살아 있는 생명체는 귀천 없이 존중되어야 한다. '한 낱 지렁이'라고 누가 그 기준을 정했던가. 이름 모를 잡초하나도 다 쓸모가 있고, 있어야 할 자리에 있다. 그것이 신의 뜻이 아닐까? 우주가 작동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귀천없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모여 조화를 이루어 이 세계는 존재하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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