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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진 Sep 11. 2023

풍경 달다

산사에서 180일

풍경 달다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며 온갖 형상들을 만들고 있었다. 산사의 마당과 지붕 위에는 눈부신 가을 햇살이 황금 화살처럼 쏟아져 내렸다. 

가끔씩 나타났다 소리 없이 사라지는 떠돌이 고양이도 오늘은 배가 고픈지 김처사를 기다리다 지쳐 햇살에 데워진 통나무 위에서 졸고 있었다. 고양이는 귀티가 흐르는 멋진 은빛 털과 우아한 자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놈이 어떻게 이 산골에서 살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무슨 기막힌 사연이 있을 것만 같았다. 고양이는 사냥을 못했거나 아래 마을에서 먹을 것을 얻지 못하여 배가 고플 때만 나타났다. 스님과 김처사는 고양이가 나타나면 먹이를 꼭 챙겨주었다. 어떤 날은 고양이가 스님이 기거하는 요사체 앞에서 하염없이 앉아 있기도 했다. 


오늘같이 스님과 김처사가 출타 중일 때는 고양이는 내가 기거하는 별채 현관문 앞에 앉아서 문이 열릴 때까지 소리 내어 울었다. 결국 고양이의 부름에 이끌려 마당으로 나오면 내 앞에서 얼렁거렸다. 배를 보이며 벌렁 눕기도 하고 눈을 마주치려고 애를 썼다. 나는 난감하고 안타까웠다. 김처사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가진 것은 고양이가 먹지 않는 것뿐이었다. 며칠 전 고양이가 반가워 음식을 조금 나누어 주었더니 냄새만 맡고는 혀를 내밀지도 않았다. 아무리 배가 고플지언정 아무거나 먹는 그런 막된 고양이는 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대웅전 뜰 앞에는 사람이 앉으면 안성맞춤인 넓적한 바위가 있었다. 스님이 가끔 태극권 수련을 하고 앉아 있던 곳이었다. 오늘은 햇살이 좋은 날이라 내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멀리 중첩된 푸른 산들과 산사에서 바라보는 풍광을 몸으로 느꼈다. 산사로 올라오는 하얀 길과 채소밭에는 한가로운 마을 개들이 짝을 지어 뛰어다니다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며칠 전에는 약초꾼이 길을 잘못 들어 산사로 오기도 했지만 가장 자주 오는 사람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집배원이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번뇌가 사라지고 숲의 소리만이 남았다. 그러나 고양이 소리에 이내 눈을 떴다. 자동차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눈을 들어 내려다보니 고불고불한 길을 따라 느릿느릿 올라오는 김처사 차가 보였다. 김처사 차는 낡은 1톤 트럭이었다. 지인들이 가끔 고물로 취급하지만 산사에서는 꼭 필요한 차라고 했다. 4륜차이기 때문에 모래나 자갈 같은 골재를 운반하거나 눈이 많이 와서 얼어붙은 길에서는 아주 요긴한 차라고 했다. 트럭이 본채 앞에서 '푸르럭' 소리를 내며 엔진이 멈추자 김처사가 차에서 내려 엉거주춤한 자세로 걸어왔다. 요즘 허리병이 다시 생겨서 아프다고 했다. 스님처럼 쑥뜸을 뜨야 되는데 잡일이 많아서 자꾸 미루다 보니 허리는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고 했다. 


김 처사는 시내 시장에서 구입한 물건을 내렸다. 

"아! 요즘 스님께 드릴 공양 준비가 어렵네요. 하루 세 번 드시는데 매번 어렵습니다"

김처사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 말했다.

나는 김처사가 내려놓은 비닐봉지와 종이박스를 보며 물었다. 

"요리를 잘하시나 봅니다."

"요리라고 하기보다는 그냥 먹을 것을 준비하는 거지요. 처음에는 아내에게 배우기도 했는데 지금은 웬만한 음식을 다 할 수 있게 되었지요. 매일 삼시 세끼 준비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답니다."

"이제는 김장도 여기서 하고 채소는 텃밭에 있는 것으로 다 해결합니다."

김처사는 절의 부엌 살림살이뿐만 아니라 바깥일까지 도맡아 하고 있었다. 가끔 힘들다고 했지만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 즐겁게 한다. 모든 것을 수용하면 마음은 평화로워진다고 하면서 한바탕 크게 웃어넘겼다. 그때 나는 김처사가 모든 것을 초월한 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물건 정리가 끝나자 김처사는 '나 좀 봐 달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한없이 애처로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고양이와 마주쳤다. 잠시 후 고양이 밥그릇은 채워졌다. 절에서는 육식을 하지 않기 때문에 시장에서 얻어온 멸치 머리 조각이 전부였다. 

"저놈은 생선이나 고기가 들어있지 않은 음식은 입에도 데지도 않는답니다. 어디서 귀하게 자랐는지 입이 아주 고급입니다."하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고양이에게서 눈을 뗀 김처사는 비닐봉지에서 종이 상자를 꺼내 보였다. 종이 상자 안에는 풍경 두 쌍이 들어 있었다. 대웅전에 아직 풍경이 없었다. 대웅전과 김처사가 기거하는 본채 입구에 매달아 보려고 한다고 했다. 오후에 작업을 하기로 하고 김처사는 스님 점심 공양을 준비하러 들어갔다. 점심때가 가까워질 무렵 스님도 마을에서 돌아와 요사체로 들어갔다.


풍경을 살며시 흔들어 보았다. 청아한 소리가 숲의 소리와 어울려 산사에 퍼졌다.

정호승 시인의 '풍경 달다'라는 시가 떠 올랐다.


............................

먼 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이 시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을 덮고 이 순간의 마음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어서 눈을 감고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모른다.


가까운 곳에서 풍경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것에 조금 흥분이 되었다. 오후에 김처사를 도와 풍경을 달았다. 나는 사다리를 잡았다. 먼저 대웅전 양쪽 처마 끝에 달았다. 드릴 소리가 크게 들렸는지 스님도 나오셨다. 김처사가 사다리에서 내려왔다. 소리가 듣고 싶은데 바람이 불지 않았다. 함께 풍경을 올려다보았다. 스님도 흐뭇한 표정으로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풍경 단 기념으로 우리는 뜰에 앉아 차를 마셨다. 스님은 풍경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풍경風罄은 원래 풍탁風鐸이라고 했다. 풍경의 구조는 탁신과 풍판과 지체로 이루어져 있는데, 먼저 방울 모양을 한 몸체가 탁신이고, 바람이 불면 흔들리도록 탁신 아래쪽에 매단 것이 풍판, 풍판이 흔들리면 탁신 안에서 탁신과 부딪혀 소리를 내는 것이 지체이다. 풍경은 주로 물고기 모양의 풍판이 많다고 했다. '물고기는 밤낮으로 눈을 감지 않으므로 수행자는 마땅히 물고기처럼 자지 않고 수행에 임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스님은 풍경을 달게 된 또 다른 비밀이 더 있다고 했다. 

 조선시대 이전에는 우리나라에도 호랑이, 늑대 같은 맹수들이 살았다. 배고픈 맹수가 동네에 나타났다거나 봇짐장수들이 공격당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것으로 보아 맹수들이 절도 습격을 했을 것이다. 대개 절이나 암자는 산속에 있었기 때문에 맹수들에게 습격을 당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절에서는 산짐승들이 쇳소리를 싫어하는 습성이 있다는 것을 이용해 풍경을 설치했다는 설이 있다고 했다. 스님을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처사도 지금은 산에 짐승이라고는 멧돼지와 고라니가 전부지만 옛날에는 우리나라에도 호랑이가 많이 살았다고 하면서 맞장구를 쳤다.


차담을 마치고 스님은 요사체로 올라갔다. 나는 홀로 한 참을 더 앉아 있었다. 혹시 바람이 불어와 풍경소리가 들려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나를 붙잡았다. 또 한편으로는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풍경소리가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내 존재를 달래줄 것 같기도 했다. 결국 바람은 불지 않았다. 

'내일은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야'라는 희망을 남겨놓고 방으로 들어왔다. 

방으로 들어와 책을 펼쳤지만 마음은 온전히 풍경에 매달려 있었다. 첫 풍경소리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풍경소리가 고요한 산사를 깨우듯 내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또 다른 나를 깨워 줄 것 같았다.


산 그늘이 산사로 내려올 때쯤 김처사가 사다리를 다시 꺼내면서 나를 불렀다. 

"선생님! 풍경을 잘 못 달았나 봅니다. 지금은 바람이 불고 있는데 풍판이 흔들리지 않아요. 확 트인 공간으로 자리를 옮겨 달아 봅시다. "

김처사와 나는 풍경을 다시 달았다. 

결국 풍경은 바람이 도와주지 않으면 자신의 소리를 낼 수 없었다. 금빛이 나는 멋진 풍경이면 무엇하리오. 바람이 도와주지 않으면 풍경은 자신의 고유한 소리를 내지 못했다. 풍경이 풍경일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은 바람이었다. 바람이 풍경을 귀한 존재로 만들어 주고 있었다. 이에 바람은 풍경의 아름답고 은은한 소리를 세상에 전하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바람과 풍경은 서로가 서로의 존재 가치를 높여주고 있다.

어느새 스님도 뜰 앞에 서 있었다. 세 사람은 무슨 신비한 소리라도 듣는 것처럼 가만히 귀 기울였다. 모든 것이 멈춘 듯 고요해지자 비로소 풍경 소리는 아름다운 소리로 답했다. 마침내 은은한 풍경소리가 맑은 대기를 타고 멀리멀리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모두 눈은 빛나고 입은 미소로 가득했다. 


스님은 두 손을 모으고 '빛나는 눈과 맑은 마음까지 실은 풍경소리가 나무와 새와 꽃들에게 전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했다. 


산들바람과 함께 풍경소리가 숲의 새들과 곤충들과 꽃들에게 닿아 축복이 되자. 그들도 일제히 아름다운 노래와 향기로 답했다. 노래와 향기까지 품은 풍경 소리는 더없이 아름다웠다. 


풍경에서 시작된 작은 울림이 사랑과 치유의 처음이 되기를, 간절한 나의 마음도 담아 본다.

참 아름답고 감사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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