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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진 Sep 11. 2023

동병상련

산사에서 180일

동병상련


어느 스님이 번뇌로 가득 찬 마음을 원숭이에 비유했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원숭이처럼 인간의 마음은 늘 생각으로 소란스럽다. 온갖 번뇌가 사라졌다가 다시 떠 오르기를 반복하면서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는 것이다. 

고대의 현자들도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에 대한 걱정, 죽음에 대한 공포, 불안, 질투와 같은 번뇌로 가득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런 마음을 잠재우고 고요해지기 위해서는 단 한 가지만 일만 하면 된다. 바로 '알아차림'이다. 내가 '지금 이런 마음이 일어나는구나'하고 알아차리기만 하면 마음은 고요함으로 채워진다고 했다. 


그래도 나의 마음은 가끔씩 번갯불이처럼 여러 사건과 얼굴들이 순간순간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용서받지 못할 일, 질투와 부러움이 차 올라 미워했던 일, 우월해지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했던 삶,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 그리고 수많은 용서들.


'네가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지'

매일 '형님, 형님'하면서 따르던 녀석이 어느 날 사기꾼으로 돌변해 있었다. 내 어깨에 무거운 짐을 얹어놓고 사라졌다. 술이 문제였다. 사업자금을 주기 시작한 것이 잘못이었다. 결국 이러한 결과는 나의 결정이고 선택이었다는 것에 변명이 여지가 없었다. 용서와 마음을 비우기까지 수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남모르게 후회와 분노와 아픔을 견뎌야 했었다.


문제는 그동안의 나의 감정이었다. 감정이란 마음의 상태가 몸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좋지 않은 감정들은 자신의 정신을 피폐시킬 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물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원리를 깨닫고 나니 더 마음이 아팠다. 그러한 감정들은 숨길 수 없는 것들이다. 표정과 눈빛, 움직임 등 말로 표현하지 않더래도 그것은 주변을 오염시켜 나간다. 가족들과 가까운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이다. 


사랑과 격려와 나눔의 시간을 가져야 할 시간의 자리에 다른 것이 차지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세월은 어제로 돌아갈 기회를 주진 않았다.



산사 근처 숲에서 요란하게 목청을 높여 노래하는 산까치들과 각가지 풀벌레들의 소리가 뒤섞여 소란해지자 고요한 산사는 다시 활기를 되찾는 듯했다. 산사의 저녁은 일찍 찾아왔다. 법당과 별채는 벌써 산 그늘이 내려앉았다. 산사 한 귀퉁이에 있는 창고문이 열렸다. 스님께서 승복의 고름을 고쳐 매며 하얀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스님은 하루에 두 번 쑥뜸을 뜬다고 첫날 김처사가 귀띔을 해 주면서 쑥뜸을 배워보라고 했다.

눈이 마주치자 스님은 밝게 웃으시며


"좋은 날입니다. 선생님! 잘 오셨습니다. 여기서 지내보다 맘에 들면 근처에 집을 마련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스님의 미소와 아낌없이 자신의 자리를 내어 주시는 것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저  '고맙습니다.'였다.



스님과 나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하나는 은퇴 시기다. 스님도 지난달에 주지 스님으로 일을 마치고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스님은 지난겨울 사고를 당했다. 강추위가 계속되어 개울물이 꽁꽁 얼어붙고 눈이 내린 길은 빙판으로 변했다. 추운 겨울날에도 스님은 산사를 짓는 일에 매달려 있었다고 했다. 그날은 트럭에 손수 자재를 싣고 트럭을 운전하였는데 그만 좁고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다 계곡으로 뒤집어지는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그때 허리뼈가 골절되어 큰 수술을 받았으나 그 이후 극심한 통증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스님은 오래전에 왕쑥뜸 전문가로부터 전수받은 방법으로 쑥뜸을 뜨게 되었다고 했다. 쑥뜸이 효험이 있어서인지 통증이 몰라보게 완화되었고, 척추도 치유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와 동병상련이라며 함께 몸을 강건하게 만드는데 힘써 보자고 하셨다. 내일부터 왕쑥뜸을 해 보라고 하시면서  몇 가지 준비물을 일러주셨다. 스님이 말씀하신 준비물을 쪽지에 적는 동안 스님은 짙은 회색빛 장삼을 두르고 대웅전 옆 작은 처소로 올라가셨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스님은 김처사의 형이었다. 김처사의 얘기로는 스님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느 날 집을 떠났다고 한다.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이모집에 간다고 집을 나선 것이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대학에 갈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왜 다른 길을 선택하였는지 김처사도 그대 그 심정을 알 수 없다고 했다. 형님의 소식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후였다고 했다. 그동안 스님을 길을 가기 위해 공부를 하고 수행을 하고 공덕을 쌓아서 주지스님까지 되었다고 했다. 주지 스님으로서 임무를 마치고 고향으로 오고 싶어서 지금의 산사를 마련했다고 했다. 김처사는 몇 해 전부터 하던 일을 잠시 접고 스님의 계획에 따라 절을 짓고 관리하며 시무를 맡게 되었다고 했다.


어쨌든 나에게는 큰 지원군을 얻은 셈이다. 감사하게도 스님과 김처사의 배려가 나에게는 지금의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하고 견뎌 내는데 큰 힘이 될 것 같았다. 고마운 일이다.

고맙다는 말로 끝내기는 뭔가 부족한 것 같지만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고맙습니다'였다. 고마움에 그저 두 손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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