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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진 Sep 11. 2023

달인

산사에서 180일

달인


산사 옆의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산길은 거칠고 험했다. 깊이 파인 길 위로 칡순이 어지럽게 덮여 있어서 어디가 길인지 분간하기 힘들었지만 다행히 오래전에 오고 갔을 사람들의 흔적은 남아 있었다. 산책 길이 익숙해질 무렵 나는 길 아래 가파른 계곡의 물가를 따라 오르다가 편편하고 햇빛이 잘 드는 바위를 발견했다. 나는 그 바위를 나만의 비밀 장소로 정했다. 매일 산책길에 계곡으로 내려가 삼십 분씩 대자연과 호흡하면서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 


원시림으로 우거진 숲길을 걷다 보면 자연은 신비함과 경이로움으로 내게 다가왔다. 

'나'라는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또 얼마나 자만하고 어리석게 살았는지를 깨닫게 해 주었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가만히 귀 기울이면 숲은 많은 소리를 들려주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곤충들과 새들이 각기 다른 소리로 자신을 뽐내고 있었다. 앞발을 모아서 서 있는 다람쥐가 먹이를 들고 입을 오물조물거리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나와 눈이 마주쳐도 아랑곳하지 않을 때 나는 그 자리에 마주 앉을 수밖에 없었다. 


산을 내려와 산사로 올라가는 작은 언덕길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산사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히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인데 한 두 사람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산사에 사람들이 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가끔 주말에 스님의 옛 신도들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와 하루 이틀 머물다 가곤 했다. 그리고 평소에 김처사가 주관하는 공사가 있는 날이면 포클레인이나 트럭이 드나들었다. 오늘은 그런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산사로 들어서자 사람들이 법당 앞에 모여 있었다. 나는 마침 본채에서 나오는 김처사와 마주쳤다. 


"처사님 오늘은 무슨 일을 하는 날인가요?" 


김처사는 소리 내어 웃으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좋은 날입니다. 대웅전 현판식과 주련 제막식 그리고 절 이름 현판식이 있는 날입니다." 


나는 김처사에게 주련이 무엇인지 물었다. 김처사는 대웅전 옆에 길게 세로로 달려있는 현판을 말하는데 그 글자의 뜻은 자기도 잘 모른다고 했다. 다만 부처님을 향한 '마음의 시'라는 것을 신도들에게 들었다고 했다. 

김처사는 법당 쪽으로 걸어가면서 계속 말을 이어갔다.


"스님께서 좋은 날을 받았지요. 나중에 현판식에 참석하셔야 합니다."

김처사는 계단으로 올라가서 사람들 틈에 끼여 현판 옮기는 일손을 거들었다.


법당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마당에 섰다. 법당을 올려다보았다. '아 맞다' 뭔가 있어야 할 곳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아챈 것이다. 절이라면 꼭 있어야 할  '대웅전大雄殿'이라는 현판이 없었다. 그리고 입구에 절 이름을 새긴 현판도 없었다. 


잠시 후 김처사는 계단을 내려와 마실 것과 과일이라도 준비해야 한다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신이 난 김처사는 나에게 몸을 바짝 붙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대웅전과 주련 서각을 한 분은 국내에서 서각 분야의 최고의 명인이라고 불리는 사람으로 스님과 먼 친척이라고 했다. 전국 팔도에서 주문이 밀려오기 때문에 여기처럼 작은 절은 안중에도 없을 정도로 바쁜 분이라고 했다. 이번 일이 성사된 것은 전적으로 스님의 공이라고 했다. 무공 스님이 친인척임을 내세워 부탁을 한 결과라는 것이다. 


명인으로 보이는 분을 멀리서 보았다. 젊은 제자들과 현판 올릴 장소를 찾느라 여기저기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분은 다부진 몸을 가지고 있었고 각진 얼굴에 흰 턱수염을 짧게 하고 있었다. 이마의 굵은 주름 몇 가닥은 많은 것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그것은 지난한 삶의 경험과 몸을 통하여 익힌 축적된 기술을 가지고 있음을 표지 하는 것 같았다. 


김처사는 스님께 들은 서각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서각은 주재료인 나무 준비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나무는 느티나무나 은행나무를 주로 사용하는데 3년 이상 자연 건조를 시켜야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또 나무는 너무 단단하거나 물러도 안되기 때문에 수분함유량이 12% 정도가 적당하다는 말도 했다. 요즘에는 건조를 빨리하려고 스팀건조를 하기 때문에 나무를 제재한 지 몇 달 만에도 작업이 가능하다고 했다. 이번에 만든 현판들은 모두 은행나무로 자연 건조를 하여 질이 좋은 나무라고 했다.

서각을 하려면 글씨를 받아야 하는데 글씨를 받는 것이 어렵다고 했다. 오늘 가져온 현판은 좋은 글씨를 받아서 서각이 훨씬 돋보인다고 했다. 대웅전과 주련은 서울에서 글씨를 받아서 서각 작업을 하였지만 절 이름은 김천에서 서실을 운영하고 있는 분으로 서예의 명인으로 추대되어 전국에서 이름이 알려져 있는 분이라고 했다. 

매주 월요일 오후에 스님이 잠깐 외출하면서 '서실에 갑니다'하며 내려가던 모습이 떠 올랐다. 얼마 전 스님방에서 '달마' 그림이 벽에 수십 장 걸려있고 방바닥에는 방금 붓질하여 먹물이 채 마르진 않는 그림들이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스님이 매주 김천 서실에 가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대웅전에서 사다리를 놓고 여러 사람이 작업하는 소리가 오랜만에 산사를 들뜨게 만들었다. 왁자지껄한 소리를 뒤로 하고 나는 쑥뜸방으로 들어갔다. 소금을 데우고 쑥을 손을 비벼 모양을 만들며 마음을 담았다. 서서히 타들어가면서 쑥은 대지와 태양 에너지를 받아서 모은 모든 에너지를 태우면서 다시 세상에 돌려주고 있었다. 나는 그 에너지를 몸속으로 받고 있었다. 쑥에서 나는 연기가 줄어들고 쑥뭉치가 잿빛으로 변했을 때 나는 몸에서 쑥뜸틀을 떼어냈다. 쑥뜸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책을 펼치다 바깥 풍경이 궁금하여 앞뜰로 나갔다. 오늘은 고요한 산사가 아니었다. 역동적이고 에너지가 넘치는 산사였다. 그래서인지 나도 방구석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명인의 작품은 아직 법당 안에 있었다. 서울에서 온 서각 팀은 젊고 근육질인 사람들이 다섯이었다. 수제자들은 스승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스승의 지시에 따라 대웅전의 현판과 대웅전 좌우 기둥에 세로로 판 주련 서각을 고정하는 작업을 몇 시간째 하고 있었다. 못이나 나사로 금방 고정하면 될 것을 왜 저리 오랜 시간 매달려 있는지 처음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역시 최고의 명인이 하는 일은 달랐다. 한 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정확하게 위치를 잡았다가 다시 확인하고 수정해 나갔다. 무게가 무거워 한 두 사람이 들어서 작업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치밀하고 세밀한 작업이라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는 것이 이해가 되었다. 어쩌면 수 십 년 수 백 년을 그 자리에 걸려 있어야 하는 현판이기 때문에 더 정밀하고 견고하게 작업을 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현판 걸이대가 완성되었는지 현판 올리는 작업을 하는 것 같았다. 육중한 대웅전 현판이 여러 사람의 손에 들려 사다리에 올라 있는 사람들에게 옮겨졌다. 고정하는 작업도 만만치 않았다. 고정 작업은 명인이 직접 하면서 제자들이 보조하고 있었다. 

'대웅전大雄殿'이라는 금색으로 칠해진 현판을 보면서 이제야 작은 법당으로 보였던 곳이 현판과 주련으로 옷을 입자 여느 사찰의 대웅전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잠시 앞마당을 서성이는데 산사로 올라오는 산 중턱에 있는 오두막집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개량 한복을 입고 짧지만 강한 인상을 풍기는 턱수염을 기른 남자가 걸어서 올라왔다. 자동차는 산아래 마을에 두고 오솔길을 걷고 싶어 일부러 걸어왔다고 했다. 키가 작고 헐렁한 옷을 입어 몸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평소에 단련된 몸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붉은 기운이 도는 얼굴과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오늘 두 명인이 아직 잘 알려지지 않는 작은 절에서 조우하고 있었다. 


김처사는 신이 나서 또 나에게 몸을 붙이면 이분이 바로 글씨를 써준 그 유명한 분이라고 살짝 일러주었다. 절 이름 현판을 직접 달기 위해서 어려운 걸음을 하였다고 했다. 오늘 글씨와 서각의 장인이 한 자리에 다 모인 셈이다.


수십 년을 한 가지에만 연구하고 몰두하여 명인의 경지에 이른 달인을 지금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마음이 숙연해졌다. 달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한 가지 일을 하면서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고 어려운 일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실패는 결국 성공으로 가는 과정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이다. 지금 스승 가까이에서 그의 말과 작은 움직임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제자들도 많은 시간이 지난 뒤에는 오늘의 스승을 뛰어넘는 달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삶을 사는 가운데 가장 위험한 사람은 '위험한 일에 도전하는 사람보다 한 번도 위험한 일에 도전하지 않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다. 삶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위험한 일을 피해 늘 익숙하고 쉬운 일만 찾는다면 거기엔 배움도 성장도 변화도 없다. 결국 삶의 여행은 위험을 감수하고 도전하는 과정이다. 신은 나를 지금 여기에 존재하도록 했다. 우주의 수많은 별이 각기 다르듯이 유일하고 특별함도 함께 주었다. 이제 이곳에서 할 일은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을 찾아야 하고 그 일에 몰입하는 것이다. 


이 세계에서 주어진 자신의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삶은 더 열정적이고 더 진실해지게 된다. 신이 내게 준 임무가 신이 내게 준 선물이라면 그 임무를 완성하는 것은 내가 신에게 주는 선물일 것이다. 나에게 임무는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하는 열정적인 삶과 진실로 사랑하는 삶이다.


범인凡人은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지만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은 천재를 알아본다고 한다. 두 달인은 서로를 단박에 알아보았다. 몇 마디 말을 나누지는 않았지만 함께 있는 자체만으로도 빛이 났다. 스님은 '그들이 혼을 담아 만든 작품은 이제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위대한 존재가 되어 그 기운이 산사를 빛나게 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두 손을 모았다. 


대웅전과 사찰 현판이 걸리고 두 달인이 만족하게 되었을 때 모두 환호와 박수로 자축했다. 그리고 대웅전 앞뜰에 모두 모였다.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무공 스님께서 나에게도 자리를 주었다. 지금 이 순간 이 아름다운 만남의 향기는 전설이 되어 오랫동안 그 향기가 바람에 실려 날아다닐 것이다.


날개 큰 노랑나비 한 마리가 스님의 어깨에 잠시 앉았다가 대웅전 위로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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