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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진 Sep 20. 2023

하산下山

103 병동

책과 독서대 그리고 낮은 책상은 그대로 두었다. 

살아서 돌아와 다시 이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검사 결과 상황이 좋아서 수술적 치료가 가능하다면 두 달 후에는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보았다. 

이제 산사를 떠나 환자복을 입어야 하는 시간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었다. 2 주 전 아내와 아들의 권유로 10년 전 수술을 하였던 병원에 예약했다.



스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스님은 "다시 돌아와 차도 마시고 쑥뜸도 함께 뜹시다"하면서 두 손을 모았다. 

김처사는 "스님께서 선생님을 위해서 매일 기도해 주시기로 했답니다."라고 말하면서 눈을 들어 환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라고 했다.


처음 산사에 올 때는 병원에 가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아인쉬타인도 말년에 치료를 거부하고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아인슈타인은 과학자이면서도 영혼의 존재를 믿은 사람이었다. 그는 늘 우주와 하나가 되기를 갈망했다.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복부동맥류가 터져 심한 출혈로 병원으로 이송되어 수술적 치료를 하려고 했지만 그는 거부했다. 주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는 담대하게 말했다. 

"지상에서 신이 주신 역할에 충실했으니 인위적으로 생명을 연장하고 싶지 않다"라고 했다. 


나도 만약 죽음이 예정보다 더 일찍 찾아온다면 받아들이고자 했다. 더 이상 내 몸을 칼로 장기를 도려내는 일은 하지 않기로 다짐했었다. 암이 더 퍼져 죽음에 이른다 해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름다운 이곳에서 삶을 마감할 수 있는 것도 큰 복이라는 생각도 했다. 모든 것을 비우고 버리고 더 이상 비우고 버릴 것이 없어지면 죽음도 아름답게 받아들여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되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결국 아내와 아들의 권유에 따르기로 했다. 아내의 말이 자꾸 걸렸었다.

"그대로 두면 고통스러운 시간을 가질 수도 있어. 그러니 한 번만 더 의사에게 맡겨 보자"라고 했다.




좁고 가파른 비탈길을 천천히 내려왔다. 눈이 얼어붙어 미끄러운 곳이 간간이 나타났다. 점점 산사는 멀어져 갔다. 산아래 마을 언저리 모퉁이를 돌아섰다. 산너머 산이 희뿌옇게 다가왔다. 대지에 온기를 선물하고 빛으로 온 세상을 밝혀주던 태양도 집으로 돌아가고 석양이 하늘을 붉게 수놓고 있었다. 붉은 하늘에 한 무리 구름 떼가 떠나는 이를 배웅이라도 하듯이 산마루에 걸터앉아 내려다보고 있었다. 



2021년 1월 28일 이른 새벽 눈을 떴다. 몸을 움직여 보았다. 밤 새 일어난 일이 꿈이었단 말인가. 아직도 자꾸만 수술장 근처 회복실의 나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 소리. 

소독약 냄새.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발자국 소리

입안에서 나오는 끈적끈적한 액체를 계속 뱉어내라는 간호사. 

이 모든 일들이 꿈으로 끝났으면 얼마나 좋을까. 커튼 너머 창밖이 희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8시에 집을 나서 김천 ktx역에서 8시 31분 발 서울수서행 기차에 탑승했다. 10시에 수서역에 도착했다. 함박눈이 소리 없이 검은 아스팔트 위로 미끄러져 내리고 있었다. 택시를 기다리는 줄이 멀리까지 이어졌다. 

'00 병원에 갑니다.'

짧고 건조한 말 한마디와 함께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시선은 줄곧 차창 밖에 두었다. 눈발이 차의 본넷과 앞 유리에 부딪혀 다가왔지만 이내 흩어져 날려갔다. 




눈 내린 아침을 좋아했었다. 하얀 눈과 마주할 때면 늘 어린 시절 고향마을에 있는 나를 발견했다. 먼동이 트고 황금빛 햇살이 구멍이 숭숭 난 문살틈으로 들어올 때면 눈이 부셔 눈을 뜰 수 없었다. 눈을 비비던 손가락 사이로 보이던 새하얀 마당과 모든 것을 하얀 눈이 덮어버린 세상은 내 작은 심장을 자극하여 감당할 수 없는 쾌감을 주었다. 하얗게 변한 세상은 나를 유혹하여 뛰쳐나오게 만들었다. 눈 덮인 대지에 첫발을 내디딜 때는 미지의 행성에 처음 도착한 사람처럼 두려움과 호기심이 공존했다. 구멍이 나서 엄지손가락이 빠져나온 벙어리장갑을 끼고 꼬마 눈사람을 만들어 눈과 코와 입을 만들어 붙이고는 자랑스럽게 지켜보았다. 추운 줄도 모르고 친구들과 동구 밖에서 뒹굴며 깔깔거리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 상황이 꿈이고 어린 시절 눈 내린 아침이 지금 이 순간이라면'하고 잠시 환상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잠에서 깨어나듯 눈을 떴다. 택시는 병원 입구를 막 지나고 있었다. 입원지원센터에서 간단한 설문 조사에 응하고 코로나 검사 결과지를 제출했다. 입원을 하려면 대장병원균 검사 결과가 음성이 나와야 한다는 추가 설명을 했다. 옆방에서 잠시 바지를 내리고 검사를 했다. 검사 결과가 나오려면 2~3시간 정도 걸리니 병원 내에서 대기하고 있으면 문자가 보내주겠다고 했다. 결과에 이상이 없으면 입원 수속 안내를 받으라고 했다. 나의 삶에서 모든 육체와 정신에서 발생하는 일은 전적으로 내게 책임이 있다는 것은 알겠지만 자꾸 마음속 에고는 누구를 탓하려고 벼르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의 상황에 순응해야 한다. 저항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마음을 편하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 식당 주변은 점심시간 전이지만 사람들로 붐볐다. 병원이 아니라 마치 시장에 온 느낌마저 들었다. 식욕이 사라졌다. 먹는다는 행위가 마치 몸속으로 무엇인가를 강제로 밀어 넣는 느낌을 줄 것 같았다. 식당을 지나 빈 의자를 찾았다. 사람들이 뜸한 조용한 공간에서 잠시 몸과 마음을 내려놓았다. 지난 일들이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쏜살같이 지나갔다. 



왜 그리도 서두르며 살았는지. 남들보다 더 많이 알고, 더 존경받고, 더 주목받고 싶은 욕망이 나를 가린 가면 속에서 꿈틀대며 기어 나오려는 것 같았다. 나를 타인의 눈에 맞게 증명해 보이기 위해 온갖 기준을 만들고 기준에 근접한 인간이 되고자 서둘러 달려왔었다. '지금 이 순간'에 머물러 본 적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하늘과 나무와 꽃 그리고 밤하늘의 별을 본 적 언제였던가. 그때의 나는 누구며 지금의 나는 누구인가?




검사결과 이상이 없으니 입원해도 좋다는 문자가 왔다. 서둘러 엘리베이크를 탔다. 무표정한 사람들이 서로의 눈을 피해 서 있었다. 10층에서 내렸다. 103 병동을 찾아 복도로 나와 안내판을 보았다. 103 병동은 낡은 병동이었다. 그것을 인지하는 내가 싫었다. 병원을 자주 다녔다는 것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간호사실로 곧장 가서 입원하러 왔음을 밝혔다. 큰 가방을 끌고 있는 나를 본 간호사는 바쁘게 어디를 가려고 했는지 잠시 머뭇거리다가 컴퓨터 앞에 앉아서 나를 옆에 앉게 했다. 간단한 인적 사항을 말하고 설문에 응대했다. 간호사는 연신 마우스와 자판을 빠르게 움직였다. 다인실을 부탁했다. 다행히 5인실에 자리가 났다고 했다. 백수가 아니었다면 2인실이라도 요청했을 텐데 지금 상황은 그런 호사를 누릴 처지가 아니었다. 34호실에 배정을 받았다. 낯설지 않았다. 10년 전이나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옷을 갈아입고 간호사실로 오라고 했다. 간호사실에서 키와 몸무게를 재고 일정을 안내받았다.


환자의 이동을 도와주는 안내원이 왔다. 젊은 남자다. 일정에 따라 채혈과 엑스레이 심전도 검사를 했다. 병실로 돌아와 잠시 쉬고 다시 CT촬영을 하였다. 촬영 전에 중화제를 맞았다. 부작용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었던 걸까. 다행히 구토 증세 없이 검사를 마쳤다. 늦은 저녁을 혼자 먹었다. CT촬영을 하러 가기 전에 저녁 배식판을 받아 침대 위에 담요로 덮어두었었다. 다녀와서 먹을 때 따뜻한 밥을 먹고 싶었다. 


담요 밑에 있는 밥을 보자. 오래전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것은 언제 올지도 모르는 손자를 마냥 기다리며 아랫목 이불속에 놋쇠 밥그릇을 가만히 밀어 넣는 모습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데 정신이 팔려 할머니는 까맣게 잊고 있을 때가 많았다. 어떤 날은 친구집에서 먹고 자고 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집으로 돌아온 손자는 할머니에게는 늘 귀하고 소중한 존재였다. 어떤 일을 한다 해도 언제나 미소로 받아 주었다. 요즈음 부쩍 할머니 생각이 자주 난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할머니께서는 시골집을 떠나게 되었다. 아파트라고 하는 아주 편리한 생활공간에 모시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시골 살림을 정리하고 도시 아파트로 모시고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치매 증세를 보였다. 할머니께서 살아왔던 삶과는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했다. 가족들은 모두 바빴다.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 고향집에서 작은 밭이라도 일구며 친구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도록 했어야 했다. 

아파트는 감옥이었다는 것을 돌아가시고 난 뒤 알았다.



입원 첫날밤은 두려움과 걱정으로 마음이 어지러웠다. 내일 예정된 내시경과 PET 검사가 자꾸 생각이 났다. 게다가 다인실은 모든 소리가 다 들린다. 쩝쩝 먹는 소리, 보호자와 소곤대는 소리, 침대에서 돌아눕는 소리, 코 고는 소리, 간호사가 들락거리는 소리, 심지어 방귀소리까지 들렸다. 점점 익숙해지겠지 하고 잠을 청해 보지만 쉽게 잠들지 못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바깥출입 통제가 심하여 마음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한다.


벌써 산사와 아름다운 숲, 새들의 지저귐, 계곡의 재잘거림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이 작은 침대에서 긴 밤을 홀로 어찌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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