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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진 Sep 23. 2023

천사의 방문 2

103 병동

천사의 방문 2



창가의 남자는 며칠 째 변이 나오지 않아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간호사나 전공의가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마지막에는 약물의 힘을 빌려야 했다. 

식사도 문제가 되었다. 먹을 때는 식판을 침대까지 가져다주지만 식사 후 배식판 회수는 각자 일정한 장소로 직접 가지고 가야만 했다. 남자는 링거 거치대를 끌고 식판을 들고 이동하는 것이 여간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가끔 옆에 있는 사람들이 도와주지만 매번 그렇게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또한 열이 오른 환자는 코로나 검사를 더 자주 했다. 남자는 각종 시술로 인하여 열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어젯밤에는 검사할 때 너무 깊게 검사봉을 집어넣었는지 코 속에서 피가 났다. 이래 저래 분노가 쌓였고 짜증이 극에 달했는지 병실 복도에서도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불만을 토했다.


간호사가 오면 그분은 기다렸다는 듯이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토해냈다. 가끔 언성도 높아졌다. 간호사는 남자의 아픔을 다 들어줄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 불만의 내용들이 간호사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개인 간병사처럼 붙어 있을 수는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남자는 침울해지고 힘이 없어 보였다.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각과별로 전공의들을 대동한 의사들의 회진이 거의 끝나가는지 바쁘게 복도로 우르르 몰려다니는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사라졌다. 

그때 마침 교대한 담당 간호사가 환자들 상황 파악 차 병실을 들어섰다. 환자들 마다 지난 8시간 동안 기록된 내용을 확인할 겸 인사도 하고 간단하게 몸 상태를 물었다. 창쪽에 있는 그분의 침대 커튼 젖히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님! 좀 어떠세요. 많이 불편하신가요."


간호사는 커튼을 젖히고 상태를 물었다. 그리고 남자의 말을 잠시 들었다.

"할아버지 많이 힘드셨죠 어쩌죠? 변이 나오지 않아서. 그럼 직접 항문으로 넣는 약을 드려 볼까요. 한 번 해 보시겠어요. 원하신다면 해 드릴게요."


"사모님이 안 계셔서 많이 불편하시죠. 오실 때까지 참고, 힘든 일은 저에게 말씀해 주세요. 힘내시고 좀 움직여 보세요. 일어나셔서 좀 걸어 다니면 좋아요. 장 운동이 되니까." 하면서 토닥여 주는 소리가 들렸다.


방금 들어온 간호사가 몇 마디 하자 그 어르신은 목소리가 조금 밝아졌다. 간호사에게 고맙다는 말도 했다. 짜증은커녕 고맙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별다른 말이 아니었다. 그냥 간호사는 친절하게 자기 환자를 돌보려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픈 것도, 짜증 나는 것도 몇 마디 말에 녹아 버렸다.


 


법정 스님은 그의 마지막 책 <아름다운 마무리>에서 “이 세상에 가장 위대한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친절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친절은 인간이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존중이며 배려이다. 친절한 말 한마디가 병실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다. 자비와 사랑이 모습을 드러낼 때 우리는 친절함을 경험하게 된다. 오늘 나는 친절한 말 한마디가 상대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고통도 사라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눈앞에서 보았다. 


우리는 자기중심적으로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한다. 진정으로 공감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던지 그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다. 간호사는 매일 정신적으로 약해지고 육체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중에서 누군가는 삶을 포기하기 직전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때 이러한 간호사의 친절한 말 한마디와 배려가 절망에 빠진 환자의 마음에 희망이라는 한 가닥 빛을 주게 될지도 모른다. 어두운 땅 속에서 봄을 기다리며 새싹을 움트고 있는 씨앗처럼.


자기가 하는 일을 사랑하는 사람은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 먹기라고 할 것처럼 정성으로 씨를 뿌리고 사랑으로 열매를 기르는 사람이다. 그리고 모든 일에 자신의 혼의 숨결을 불어넣고, 바람 소리를 더 달콤한 노래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이다. 방금 병실에 찾아온 간호사에게서 나는 아름다운 영혼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간호사의 따뜻하고 아름다운 마음은 땅을 뚫고 나온 한 송이 꽃이 온갖 빛깔과 향기로 대지에 보답하듯이 병실의 사람들에게 맑은 마음을 깃들게 했다.



잠시 후 침대 커튼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분의 마음을 안정시킨 간호사는 병실을 나가려고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재빠르게 커튼을 살짝 걷고 간호사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간호사와 눈이 마주쳤을 때 엄지를 세우고 '엄지 척'을 했다. 얼굴이 마스크로 가려져 있었지만 미소 짓는 간호사의 맑은 눈은 분명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음을 말해 주었다.

 

친절과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무엇을 하든 다른 이들에게 기쁨과 웃음을 선물한다. 반면 시기와 미움을 갖고 있는 사람, 번민과 고통 속에서 사는 사람은 무엇을 하든 다른 사람에게 비참함과 번뇌만을 안겨 줄 뿐이다. 

사람은 오직 갖고 있는 것 만을 줄 수 있다.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어떻게 줄 수 있겠는가?



저녁 식사가 끝나고 흰 가운을 입은 중년의 여자분이 의료 기구를 실은 운반대를 밀고 찾아왔다. 혈액을 채취하러 왔다고 했다. 5분 간격으로 세 번을 채혈한다고 했다. 간 기능의 회복 능력과 해독 기능을 검사한다고 했다. 수술을 하려면 간의 기능이 어느 정도 정상 수치에 근접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먼저 녹색 액체를 주입하고 약물이 혈관으로 이동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채혈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채혈 대기 시간에 나의 두려움과 불안한 마음을 꽤고 있는 듯 수술에 대한 공포를 해소시켜주려고 했다. 수술을 하는 의사는 최고의 외과 의사로 수술 경험이 많아 명의로 불리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질문을 하고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말하는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공감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은 큰 위로를 받는다. 그녀는 길지 않은 시간에 나를 미소 짓게 만들어 주었다. 두려움과 막연한 걱정을 잊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정말 감사한 분이다. 


절망과 두려움이 배어 있던 침대에서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산사에 봄이 오는 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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