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호진 Sep 30. 2023

위장된 축복

치유의 숲

위장된 축복



현자들은 '기쁨이 찾아왔을 때 가슴 깊은 곳을 들여다보라고 한다.'

 

심연으로 내려가 가만히 들여다보면 지금 이 순간 나에게 기쁨을 주고 있는 것들이 그동안의 삶 속에서 고통과 슬픔을 주었던 것들이라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슬픔이 다가왔을 때 깊이 들여다보면 지금 이 순간 슬픈 일들이 원래는 기쁨을 주었던 일들임을 알 수 있다. 

어쩌면 고통은 기쁨을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암이 처음 찾아왔을 때 나는 신의 의도를 알지 못했다.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는가?라고 말하며 신의 의도를 의심했다. 나를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인생을 살다 보면 고통스러운 일이나 슬픈 일도 일어나기 마련이지만 그때는 신의 뜻이 고통을 통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재탄생시키려는 것임을 알지 못했다. 

그 후 고통을 이겨내고 고난의 시간이 지나가면서 도리어 고통은 인생이 주는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고통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정신은 더욱 단련되어 단단해졌고 살아야 할 이유와 살아가는 힘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통은 나에게 인생이 주는 선물이 되어 나를 더 크게 성장시키고 매 순간의 삶이 기적이고 신비라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천년을 산 소나무에게 뿌리를 흔드는 거친 태풍과 모진 추위를 견디는 시련의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었을 수 있겠는가? 

인생을 살다 보면 고통, 시련, 증오, 질투 등과 같은 악조건과 독이 되는 장애물들이 앞을 가로막는 일이 생긴다. 이때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들을 극복할 기회를 얻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면서 더 험난한 세상과 당당히 마주할 만큼 강하게 단련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련과 고난을 통하여 인간이 성장한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세상의 그 어떤 어려운 일이 닥쳐도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니체도 '만일 우리가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이유를 안다면, 우리는 이 세상의 어떠한 고통도 견딜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신비로운 색으로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는 고려청자도 그 색을 갖기까지 도공의 수많은 실패와 뜨거운 가마 속을 견디어 마침내 탄생한 것이리라. 고통이 시작되는 순간 기쁨은 잉태되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언젠가의 기쁨을 위하여.


나는 분노와 절망과 근심 그리고 불행하다는 마음이 일어나면 감정으로 표출하거나 무조건 그것들을 마음에서 지우려고만 했었다. 어쩌면 그렇지 않은 척하면서 가면을 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때 현자들은 그것들과 함께 살아가라고 말한다. 인간을 성장시키는 것은 바로 이런 상황들이라는 것이다. 


맹자는 <고자> 편에서 

'하늘이 장차 큰 임무를 어떤 사람에게 내리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그의 근육과 뼈를 힘들게 하며, 그의 몸을 굶주리게 하고, 그의 몸을 가난하게 하며, 어떤 일을 행함에 그가 하는 바를 뜻대로 되지 않게 어지럽힌다. 이것은 그의 마음을 떨쳐 일으켜 세우고 성질을 참을성 있게 해 그가 할 수 없었던 일을 해낼 수 있게 도와주기 위한 것이다.'라고 했다.


이처럼 현자들은 고통이나 시련을 수용하라고 말하고 있다. 어쩌면 그것들은 축복을 위장한 신의 뜻인 줄 도 모른다. 나를 더 성장하기 위한 신의 가혹한 계획인지도 모른다. 신이 욥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욥의 믿음을 시험한 것처럼. 



여기 희비가 엇갈리는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산골 마을에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노인에게는 멋진 말이 있었다.
그 말은 너무나 아름답고 날렵 하여 마을 유지뿐만 아니라 인근 부자들까지 말을 사고 싶어 했다. 그들은 높은 가격을 제시했지만 노인은 언제나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어느 날 아침 노인과 아들은 마구간을 보고 놀란다. 마구간은 비어 있었다. 사람들은 노인을 비웃었다. 그때 팔았다면 부자가 되었을 텐데 하고 수군거렸다. 노인에게는 말이 집을 나갔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말했다. 며칠 지나 노인의 집에는 말이 12마리로 늘어났다. 집 나간 말이 야생마 12마리를 데리고 온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노인에게 당신의 기다림이 옳았다고 말하면 부러워했다. 갑자기 말 부자가 된 노인은 말이 사라졌다가 다른 말을 데리고 왔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말했다.

그런데 어느 날 노인의 아들이 야생마를 길들이다가 말에서 떨어져 그만 다리를 크게 다치고 말았다. 그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노인에게 아들이 이제 불구자가 되어 일도 하지 못하고 큰 일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노인은 이번에도 아들이 다쳤을 뿐 달라진 것은 없다. 다만 아들이 다리를 절뿐이다라고 말했다.

몇 달이 지나고 이웃나라와 전쟁이 발생했다는 소문이 돌고 젊은이들이 징집되기 시작했다. 노인의 아들만 남았다. 그는 군대에서 쓸모가 없는 사람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노인에게 당신의 아들만 살아남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다 죽을 것이다. 전쟁에서 살아남을 일은 거의 없다고 했다. 


노인의 이야기는 비유다. 어떤 일에 대하여 또 어떤 사람에 대하여 우리는 늘 자신이 볼 수 있는 세계의 범위에서 해석하고 평가한다. 이에 노인은 사실 만을 보라는 메시지를 던져 주고 있다. 그러면 마음이 일으키는 소란을 잠재울 수 있다고.


삶은 '지금'만 있을 뿐이다. 

'나' 자신을 들여다보기 시작할 때 개선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