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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ever Oct 26. 2022

올드 소울을 가진 아이

아들에게 쓰는 편지 5

휴가를 쓸 때면 고민이 된다. 뭘 하면 알차게 보낼 수 있을까? 다른 건 몰라도 나 자신을 위해 쓰고 싶다. 오롯이 나를 위한 휴식 시간을 타인에게 할애하면 대체 나는 언제 쉰단 말인가? 물론 가족도 타인이다. 몇 날 며칠을 치열하게 살다가 겨우 하루 나를 위해 부여한 휴가에 와이프 심부름하랴, 아들 뒷바라지하랴 보내다 보면 시간이 부족하다. 애초에 하루가 24시간이란 게 문제인 걸까? 왜 이렇게 휴가는 짧은 것인가.


그날도 휴가를 쓴 날이었다. 사실 회사에 휴가원을 내고자 할 때부터 고민했다. 맞벌이 가정이므로 와이프는 내가 회사를 가는지 안 가는지 관심 없을 테고, 아들이야 어린이집에 보내면 그만이고. 그냥 몰래 쉴까? 어차피 아들 낳은 뒤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본 적도 없지 않은가. 이때 아니면 언제 쉬어? 음, 혼자만의 시간이라… 생각만 해도 너무 달콤해서 입가의 미소가 스르르 번진다.


그러나 아빠로서 책임감이 걸린다. 일 나간 와이프와 가기 싫은 몸 억지로 끌고 어린이집에 들어간 아들내미를 생각하니 혼자만의 휴식이 사치로 느껴진다. '나만 아니면 돼'라고 생각한 거야? 내가 지금 그런 마음을 품은 건가? 아이고, 이 한심한 인간아. 이기적인 마음먹을 시간에 돈 한 푼 더 벌 궁리나 할 것이지.


결국 가족을 위해 휴가를 쓰기로 했다. 평소 못 했던 집 청소도 하고, 밀린 빨래도 좀 돌려야지. 매일 아침 등원하기 싫다고 시위하던 아들의 염원도 들어줘야지. 오늘 하루는 아들을 데리고 있으련다!



나는 계획형 인간답게 찹쌀이와 할 일들을 나열했다. 모래놀이, 숲 속 가기, 장난감 놀이, 이것저것 꽁냥꽁냥 만들기, 책 읽기, TV 보기, 돈가스 먹기, 클레이 놀이, 블록 만들기 등 할 것들 천지였다. 하루가 부족하면 어떡하지? 새로운 고민이 시작될 즈음 찹쌀이가 가장 하고픈 것을 골랐다. "모래놀이!"


“오야. 그러자.”

평소 모래놀이를 하고 싶었던 찹쌀이는 엄마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하곤 했다. 거실에 지름 160cm짜리 김장 매트 깔아놓고 모래놀이를 한다고 해도 이 성질 급한 모래알들이 문제다. 이것들이 하나같이 허둥지둥 함부로 날뛰다 보니 자꾸만 김장 매트 밖으로 튀어나간다. 이들 모래는 놀이가 끝나면 물걸레로 세 번이고 네 번이고 닦아내야 했기에 우리 집에서 모래놀이는 금기에 처해졌다. 엄마의 금지령은 절대적이었다. 그렇다 보니 엄마가 없는 나의 휴가가 찹쌀이에게는 디데이였던 셈이다.


하지만 찹쌀이는 아빠를 오해하고 있었다. 아빠는 집에서 모래놀이를 할 생각이 없다. 오늘이 휴가라는 게 밝혀진 이상 그날의 집 청소는 아빠의 몫이 됐고, 모래놀이를 한다면 부침이 예상됐다. 머리 좋은(?) 아빠는 검색 끝에 모래놀이를 할 수 있는 집 근처 상가로 향하리라 마음먹었다.


쉬는 날은 집에서 가족과 보내는 걸 최고의 휴식으로 여기는 찹쌀이에게 외출하자는 건 어린이집에 가는 것만큼 힘든 일이었다. “나가면 맛있는 거 사줄게”, “젤리 줄게” 아빠의 달콤한 속삭임이 씨알도 안 먹힌다. “뽑기 하자. 나가면 뽑기 기계가 가득해”라고 하자 꿈쩍 않던 녀석이 생각에 잠긴다. 옳거니! 입질 왔다. 이 타이밍에 몰아붙여야 한다. “거기 가면 모래놀이도 할 수 있고 뽑기도 하자. 뽑기 세 개 하자. 아이스크림도 먹고.”



녀석은 제안에 응했고 우린 근처 상가로 달렸다. 모래놀이로 가볍게 몸을 푼 찹쌀이는 뽑기 기계가 즐비한 곳에서 본격적으로 놀 채비를 했다.


요즘 뽑기 기계들은 다양했다. 진득이부터 열쇠고리, 탱탱볼, 각종 캐릭터 피겨까지 종류가 많기도 하다. 한 번 뽑는 데 2000~3000원이나 하는데 어떤 건 랜덤이라서 못 뽑는 경우도 있었다. 뭐가 나올지도 모르니 가장 만족도 높아 보이는 걸 뽑고자 했다. 쓰윽 둘러보니 '태권브이' 피겨 뽑기가 눈에 들어왔다. 아직도 이걸 가지고 노나? 요즘 애들이 이걸 안다고? 그래도 로봇이니까 애매한 열쇠고리보다 나아 보여서 그걸 뽑았다.


검지 손가락 만한 작은 태권브이 피겨를 손에 넣은 찹쌀이는 좋아했다. 그땐 몰랐다. 이 작은 피겨가 불러올 엄청난 여파를.


그로부터 3주일째 우리 집에는 태권브이 주제곡이 재생되고 있다. 끝났다 싶으면 어느 순간 다시 켜지는 노래를 듣고 있자니 마치 마르지 않는 샘물 같다. "달려라 달려 로보트야. 날아라 날아 태권브이…" 어린 최호섭의 청량한 보컬이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물렸다.  


내 귀여운 아들이 좋아한다는데 내버려두어야지 별 수 있나. 태권브이 노래를 좋아하니 영상도 보여주고자 했다. 태권브이는 유튜브에 몇몇 영상 말고는 시청할 콘텐츠가 없어서 화질 나쁜 옛 영상을 틀어줬다. 그게 그렇게 재밌단다. 낮은 화질이 자꾸 걸리고 싸움 장면도 적지 않아 요즘 애들이 많이 본다는 헬로카봇을 틀어줘 봤다. 그런데 싫단다. 헬로카봇은 무서운데 태권브이는 멋있단다. 왜지?


하필 제일 좋아하는 영상도 1976년 버전 주제곡과 그 영상이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제작된 것들이다. 세상에, 녀석이 레트로가 유행이라는 걸 아는 걸까? 그래도 그렇지, 그 옛날 것에 공감하는 걸 보면 녀석은 '올드 소울'을 가진 게 분명하다.


생각해보면 찹쌀이는 음식 취향도 올드하다. 요즘 입맛인 피자, 햄버거보다 동치미와 고사리나물을 좋아한다. 지금은 덜 하지만 세 살까지만 해도 국이 없으면 밥을 안 먹었다. 국 중에는 된장국을 제일 즐겨 먹었다. 그때마다 나와 와이프는 우스갯소리로 확신했다. 인생 경험이 별로 없는 찹쌀이가 옛 것을 선호하는 건 분명 올드 소울을 갖고 태어났기에 가능하다고. 아니라 다를까 영상 취향까지 올드할 줄이야.


괴수는 나, 태권브이는 아들. 브런치에서나마 아들을 이겨보고자 태권브이가 괴수에게 당하는 이미지를 남긴다.


요 며칠 녀석은 영상 시청을 넘어서 태권브이 놀이를 하자고 덤빈다.

"아빠가 괴수 해. 난 태권브이 할 게."

"아냐 아빠가 태권브이 할 거야."

"안 돼!!!!!!!!!!!"


주인공은 꼭 지만 한단다. 어이없지만 아빠는 괴수나 해야지 어쩌겠나.


p.s) 시간이 지나도 기억할라나? 네 인생 최초의 히어로는 로보트 태권브이(1976)였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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