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아들에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lever Oct 21. 2022

우린 생각의 간격을 좁히지 못했고 결국 나는 화를 냈다

아들에게 쓰는 편지 4


찹쌀이는 생후 44개월 무렵까지 밥을 거부했다. 밥상에 앉아있는 것 자체를 힘들어했다. 엄마나 아빠 닮았으면 밥은 둘째치고 밥공기까지 씹어먹었으련만 녀석은 누구도 닮지 않았다.


처음에는 다행이라고 여겼다. 평생을 대식가로 살아온 내게 식탐은 인생에 있어 백해일익 정도의 가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먹는  좋아하면 무얼 하나? 과식하면 건강에  좋은 것을. 사회생활을  때에도 먹을 것을 탐하는 태도는 상대방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 않나?


반면에 한 두 숟가락 밥을 떠먹다가 내려놓는 찹쌀이는 자기를 절제할 줄 아는, 멋진 녀석이 아닌가. ‘무릇 문명화된 사람이라면 자신의 배가 어느 정도 찼을 때 스스로 절제할 줄 알아야지.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말고.’


물론 식탐이 많은 나도 평생 미움받은 적은 없다. 어느 정도의 선을 넘지 않으려고 노력했기에 눈총을 받지 않았던 거다. 오히려 잘 먹는다며 선배, 동료들에게 이쁨을 받은 케이스다. 그럼에도 공허했다. 잘 먹는 것보다는 소식하는 게 왠지 더 기품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먹는 것을 좋아하는 내 성향에 콤플렉스를 가졌던 것 같다.


그렇게 살아온 지 어언 40여 년. 고치지 못할 줄 알았던 식탐 콤플렉스를 단 번에 깨부숴 준건 내 귀여운 아들이다. 무려 4세의 나이에, 별도의 의학 지식도 없이 수십 년간 앓던 아비의 정신병을 고쳐주다니, 녀석이야말로 진정한 명의가 아닌가. <동의보감>을 집필한 허준도 스무 살이 되어서야 이름을 날렸거늘, 그보다 16년이나 빠르다.


찹쌀이의 치료법은 파격적이었다. 밥상에서 밥을 거부하면 나의 화가 치밀고, 나중에는 제발 좀먹어달라고 애원하게 만든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자연스레 깨닫는다.

‘잘 먹는다는 건 좋은 것이었구나!’

‘잘 먹는 행위는 누군가에게 부러움을 살 만큼 가치 있는 것이구나!’

‘식탐 있는 나 자신을 소중히 생각해야지!’


깨달음도 잠시. 안 먹는 찹쌀이의 모습에 슬슬 화가 치민다.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는데, 녀석이 대뜸 필살기를 꺼낸다. 그 기술은 눈 깜짝할 새 발현되어 나를 무력화시킨다. 발현까지는 크게 3단계를 거친다.

밥을 입에 넣는다.

한쪽 볼 안쪽에 박아둔다.

씹지 않고 세월아 네월아. 끝.


이때만큼은 찹쌀이의 빵빵한 볼이 귀엽지 않다. 그 속에 밥이 한가득 들어있질 않나. 저걸 씹는 게 그리 어려운가? 턱 근육 몇 번 움직였다가 삼키면 그만인 것을 10분이고 20분이고 저장만 해놓는 꼴을 보니 울화통이 터진다. 무슨 다람쥐도 아니고.



나는 이내 극심한 현타에 빠졌다. 서른 살 이상 나이가 많으면 무얼 하나? 이 조그만 녀석 하나 당해낼 재간이 없는 것을. 삶의 경험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래도 어른이니 인내하고, 쉽게 포기하지 않는 근성을 보여주리라.’

마음을 다잡고는 다시 설득에 나섰다. 설득은 권유로, 권유는 충고로 바뀌고, 결국 도돌이표처럼 조금 전 현타가 왔던 상황과 마주했다. 오히려 감정은 더욱 격해져 통제력을 잃기 직전에 이르렀다.


‘파이어!!!!!!!!’

마음속으로 포효했다.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에 걸쳐 아주 길게. 한숨이라도 쉬어야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아서 그렇게 했다. 그제야 조금은 냉정을 되찾았다. 출구 전략을 고심했다. 방법은 하나였다.

'햄을 주자.'


햄은 아이라면 환장하고 달려드는 마성의 메뉴가 아니던가. 엄마는 찹쌀이가 아직 어리니 웬만하면 주지 말라고 했지만 방법이 없질 않나.(보통의 아빠들은 이런 이유로 인스턴트와 육가공품을 주기도 한다) 찹쌀이도 슈퍼에서 간식을 고르라고 하면 늘 소시지를 1순위로 가져왔으니 햄도 분명 잘 먹을 거라 확신했다.


생각대로다. 프라이팬에 대강 굴린 비엔나소시지를 줬더니 잘 먹는다.

'이거라도 먹는 게 어디냐. 많이 먹어라!'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녀석이 포크를 내려놨다. 딱 두 번째 포크질을 하고 난 뒤였다.

"왜?"

"맛이 없어."

"너 소시지 좋아하잖아."

"맛이 없어."

"그러니까 왜?"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우린 벌어진 생각의 간격을 좁히지 못했고 결국 나는 화를 냈다. 버럭 소리에 찹쌀이도 대성통곡으로 맞섰다.

'화내는 아빠에게 대항할 수 있는 건 우는 방법밖에 없었을 테지.'

녀석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고 있었지만 식습관을 바로 잡아주고 싶었다. 충고는 계속됐고 찹쌀이도 지지 않고 울음소리를 높였다.


우린 그렇게 서로 지쳐갔다. 마치 오래된 연인같이 각자가 잘하는 대화를 하고 있었다. 아빠는 말로, 아들은 울부짖음으로 감정을 얘기했다.


결과는 무승부. 한동안 울던 찹쌀이는 스스로 울음을 그쳤고 나는 달래주지 않았다. 오히려 훌쩍이며 안아달라는 녀석을 매몰차게 밀어냈다.


아빠는 떼쓰는 아이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



갑자기 찹쌀이의 기세가 꺾였다. 아빠가 안아주지 않는 것이 두려웠던 모양이다. 그걸 아는 나도 마음이 누그러졌다. 그래도 안아주지는 않았다. 밥 먹는 건 생존과 연관된 것이니 훈육을 해서라도 먹여야 했고, 그걸 위해 매몰차게 몰아붙인 것이다. 훈육할 땐 안아주지 말라는 전문가들의 의견도 잘 따랐다. 하지만 끝내 패배를 인정하고 꼬리 내리는 아이를 보는 것도 그리 개운하진 않았다. 녀석이 밥의 중요성을 깨닫고 울음을 멈춘 게 아니라는 점이 못내  찜찜했다.

'그저 아빠가 자기를 싫어할까 봐 고집을 꺾은 거겠지.'


이 같은 상황은 수개월간 계속됐다. 밥시간만 되면 나는 "먹어라", 아들은 "싫다"의 반복이었다. 감정 낭비라고 여길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시간이 다소 걸리는 참 교육'이라 생각하며 버텼다. 녀석은 밥 먹는 즐거움을 모른 채 시간이 흘렀고, 나는 불안해졌다. 적게 먹는 것을 찬양하던 처음 마음과 달리 찹쌀이가 먹는 행복을 누렸으면 했다.



언젠가 우리 식구 모여 앉아
오붓한 대화를 나누며 즐거운 식사를 할 때가···.
오긴 오겠지?



간절한 바람은 정확히 찹쌀이 생후 44개월이 지나면서 이뤄졌다. 어느 순간 밥을 꿀떡꿀떡 삼키더니 다람쥐 같은 볼빵빵한 모습도 사라졌다. '그날따라 배가 고팠나?' 싶었지만 아니었다. 녀석의 식습관은 서서히 바뀌고 있었다. 어떤 반찬과 함께 줘도 밥을 곧잘 삼켰다.

'이거야! 됐다, 됐어'


그로부터 한 달 남짓 지났다. 찹쌀이의 밥 먹는 페이스는 더 올라갔다. 진정으로 먹는 법을 알게 된 거라는 확신이 섰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그간의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악에 바쳐 우는 아이와 화를 꾹꾹 누르며 포기하지 않던 아빠의 나날이 눈물겹다. 스트레스 가득하던 우리의 식사 전쟁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어떤 계기로 녀석이 잘 먹게 됐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때가 됐으니 먹는 거겠지'라고 여기련다.





44개월을 마무리 한 아들에게 


아들아, 너의 44개월은 분주했단다. 하루가 다르게 키와 몸무게가 늘어갔고, 어른과 진배없는 모국어 구사 능력을 갖춘 것도 그때부터였단다.


그 외 수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네가 밥을 제대로 먹을 줄 알게 된 데서 아빠는 가장 큰 보람을 느꼈다. 너는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밥을 먹을 줄 안다는 건 앞으로 수십 년간 계속될 네 삶을 완주해낼 기본 근육을 갖췄다는 의미란다.


생각해보면 너의 44개월은 하나의 과정을 끝내고 새로운 시작을 기다리는, 매우 설레는 시기란다. 이제 넌 훨씬 더 큰 세상을 보게 되겠지. 밥을 먹다 보면 맛을 알게 되고, 맛을 알면 더 큰 세상을 마주하게 될 거야. 아빠와의 치열한 사투를 거치며 이미 조금은 알게 됐을걸? 맛이라는 건 사람마다 다르다는 걸. 아빠는 밥이 맛있는데 넌 맛이 없었지. 거기서 '사람은 저마다 생각이 다르다'는 걸 깨달았을 테지. 설령 깨닫지 못했더라도 괜찮아. 앞으로 알아가는 게 더 중요해. 아빠는 확신한단다. 맛을 알면 분명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까지 알게 될 거야.


그러니 맛을 아는 아이로 자라렴.


한 가지 일러둘 게 더 있어. 아빠나 엄마처럼 누군가에 의해 시작과 끝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어린아이의 특권이란다. 하나를 어떻게 끝내고, 어떤 마음으로 시작하느냐에 따라 너의 미래는 달라져. 그 역시 어리기에 가능한 일이란다. 어른이 되면 하루, 일 년이 크게 다르지 않게 흘러갈 때가 많아. 44개월의 너처럼 새 출발을 하려면 오직 본인 노력에 의해서만 가능하지. 이미 그 모든 과정을 경험한 어른 아빠가 무수히 많은 새 출발들을 앞둔 너에게 아낌없는 격려를 보내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단다.


명심해. 우리가 밥을 잘 먹기 위해 노력했던 것처럼 어느 정도의 고통은 달콤한 결실을 맺게 할 거야. 그러니  울며불며 고통 속에 무언가가 끝이 나더라도 속상해할 거 없어.

 

기억해다오. 그런 수많은 실패가 너를 단단하게 만든다는 것을.


- 아빠가





매거진의 이전글 남자아이들은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