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 쓰는 편지 6
어릴 적 우리 가족은 경기 북부 계곡으로 자주 놀러 갔다. 한탄강, 백운산, 재인폭포, 산정호수는 우리 가족의 단골 코스였다. 나는 막내여서 맨날 뒷자리 가운데에 앉았다. 그게 너무 싫었다. 늦게 태어난 게 죄인가? 왜 나만 이렇게 바닥이 툭 튀어나온 데 앉아야 하나? 다음번엔 늦게 타던가 아예 잽싸게 타서 꼭 창가에 앉으리라 다짐하지만 계획은 늘 수포로 돌아갔다. 서러워서 아빠 차에 타는 게 싫었다.
아빠 차가 싫은 이유는 또 있다. 아빠가 맨날 뽕짝만 틀었기 때문이다. 왕왕왕왕 울리는 신시사이저와 둥둥 한도 끝도 없이 내려가는 저음의 베이스가 귀에 거슬렸다. 노래도 왜 저렇게 신이 나야 하는지, 어린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노래방 마이크로 부른 것처럼 에코 가득한 녹음 상태는 또 어떤가?
'아주 최악이야!'
태진아, 송대관, 설운도, 현철 당시 전성기를 보내고 있는 트로트 4대 천왕의 노래는 그나마 들을만한데, 아빠에겐 그들도 요즘 가수일 뿐이었나 보다. 아빠는 트로트가 아니라 뽕짝을 선호했다.
아빠의 취향은 뽕짝이었으나 노래 부를 때는 서유석만 찾았다. '가는 세월'(1977)은 아빠의 십팔번이었고 틈만 나면 노래해서 엄마랑 나는 그만 좀 하라고, 또 시작이라고 타박했다. 퇴근하고 부르고, 씻고 부르고, 밥 먹고 부르고, 아들 TV 보고 있는데 느닷없이 옆에 와서 부르고. 이거 참 가늠할 수가 없었다. 싫다고 말하면, 그런 우리의 반응이 재미있었는지 아빠는 데시벨을 한껏 더 올린 창법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1990년, 반격의 기회가 찾아왔다. 나는 취학반에 들어가면서 유치원에서 '형아'라고 불리게 됐다. 일곱 살 형아를 누가 괴롭히겠는가. 다음 해에 국민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는 그 1년은 '형아병'에 걸려서 모든 게 내 세상으로 보였던 것 같다.
그날도 지금처럼 11월, 가을이었다. 우리 가족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백운산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어김없이 아빠는 뽕짝으로 차 안을 채웠고, 힘없는 우리는 듣고만 있었다. 그런데 아빠가 조작을 잘못했는지 라디오가 재생됐다. 오예~ 찬스다.
"아빠 이거 들을래."
아빠는 서둘러 뽕짝을 틀으려고 했으나 일곱 살 형아병에 걸린 나를 이길 수는 없었다. 떼쓰고 우겨서 성취한 처절한 승리. 라디오를 쟁취한 나는 노래든 디제이의 음성이든 상관없었다. 뭐든 뽕짝보다 100배, 1000배는 훌륭한 음악이었다.
그런데 왠지 아픈 사람 목소리가 스피커로 흘러나왔다. 걸걸했고, 고음 파트에서 힘을 잔뜩 줘 겨우 불러내는 힘겨움이 느껴졌다. 바이올린은 서정적인 멜로디를 탔고 가수의 터프한 음색과 어우러졌다. 어린 나의 마음에도 슬픔이란 감정이 느껴질 정도였으니 명곡이 틀림없다. 노래가 끝나니 디제이가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라고 했다.
'이렇게 좋은 노래가 있었단 말인가!'
'아빠는 왜 이런 노래 안 듣고 뽕짝만 듣는 건가.'
'아빠가 싫다.'
'기-승-전-아빠 싫음'으로 이어진 나의 논리에는 이제껏 뽕짝만 들려주어 나를 그 세계에 매몰되게 했던 아빠에 대한 원망과 서운함이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내 사랑 내 곁에'는 내가 들은 최초의 발라드이자 완곡을 들으며 빠져들었던 노래다. 커서 알았는데, 1990년 11월 1일 김현식은 사망했다. 라디오에서는 그를 추모하는 의미로 노래를 틀었고, 운명처럼 그걸 내가 들은 것이다. 성인이 된 지금도 '내 사랑 내 곁에'는 가장 슬픈 노래 중 하나로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 아직도 그 바이올린 전주를 들을 때면 가슴이 먹먹하고 쓸쓸하다. 허스키 보이스는 말할 것도 없고.
어릴 적 아빠를 이겨먹었던 나도 내 아들에게 당하질 못한다. 자식 있는 집은 이해하겠지만, 차만 타면 애들이 좋아하는 음악 위주로 틀고 있다. 언제나 신이 나 있는 변성기 이전의 청량한 보컬이 동요를 부른다. 음악도 신나고 우리 가족은 들뜬다. 아까도, 지금도, 오늘 밤에도. 아마 내일도, 모레도 우린 들뜰 것이다. 들뜨다 못해 우주로 날아가버릴 것 같은 텐션에 나는 슬슬 지쳐가지만 아들은 아니다. 그래도 우리 집은 약자 우선주의라 아들의 선곡 위주로 플레이한다.
그런데 엊그제는 그 룰을 깨는 일이 벌어졌다. 차에 타서 시동을 켰는데 동요가 아니라 가요가 재생되고 있었다. 와이프와 나는 마주 보고 '그냥 듣자'는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찹쌀이는 얼렁뚱땅 가요가 플레이되는 차를 타고 이동하게 됐다. 처음 발라드 한 두곡이 나올 때 녀석은 지 놀기 바빠서 그랬는지 몰라도 별 반응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동요가 아니란 걸 눈치채고는 음악을 바꿔달라고 했다. 그동안 동요만 듣느라 피로감이 쌓여있던 나와 와이프는 한 곡만 더 듣고 넘기자고 제안했다. 녀석은 안 된다고 발버둥 쳤지만, 그날따라 나와 와이프는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와이프의 의지가 가장 강했다.
“얘야 '브라보 마이 라이프'(봄여름가을겨울)라는 노래야. 이 노래 좋아.”
“아냐, '세균 왕국' 노래 틀어줘.”
“한 곡만 듣고 틀어줄게. 이 노래 오랜만에 들으니 좋단 말이야.”
와이프도 감상을 중간에 끊고 싶지 않았던 거다. 우리가 언제까지 유아의 높은 텐션을 감당할 순 없지 않은가. 때론 발라드도 들어줘야지. 하지만 찹쌀이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가요 감상에 방해되게 떼를 쓰기 시작했고, 나는 어릴 적 아빠의 기술을 썼다.
“부라보 부라보 나의 인생아~”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찹쌀이도 크게 떼를 썼다. 나는 목소리를 더 키워서 노래방에 온 듯 쩌렁쩌렁 고음을 내질렀다. 왠지 모르게 스트레스가 확 풀렸다. 가뜩이나 노래방도 못 간지 오랜지라 신이 났다. 와이프도 동조한다. 어라? 이거 재미있네? 떼 쓰는 아들내미도 귀엽잖아? '이게 음악이 주는 힘이구나' 개똥철학을 주장하며 33년 전 아빠의 스킬에 엄지를 치켜들었다.
'아버지, 이거 잘 먹히는 기술이었군요.'
그렇게 한 곡이 오롯이 끝나자 동요로 넘어갔다. 가요를 더 못 들어서 아쉽지만 괜찮았다. 그리고 어릴 적 아빠 차에서 들었던 '내 사랑 내 곁에'가 떠올랐다. 그 기억이 지금까지 나의 뇌리에 남아있는 것처럼 찹쌀이에게도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간직되길 바랬다. 물론 어렵겠지만.
언젠가 녀석이 '브라보 마이 라이프'라는 노래를 아는 날이 올까? 나이를 먹고 나와의 실랑이를 회상하며 그 아들딸에게 전해주겠지? 아, 상상만 해도 웃음이 나온다. 과연, 이 천둥벌거숭이가?
p.s) 아들아,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네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완곡을 들은 가요란다. 아빠에겐 '내 사랑 내 곁에'라는 노래가 그렇단다. 언젠가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노랫말의 의미를 알게 된다면 우리 집에서 하산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아빠의 인생 첫 가요를 너에게 바친다.
나의 모든 사랑이 떠나가는 날이
당신의 그 웃음 뒤에서 함께 하는데
철이 없는 욕심에 그 많은 미련에
당신이 있는 건 아닌지 아니겠지요
시간은 멀어 집으로 향해 가는데
약속했던 그대만은 올 줄을 모르고
애써 웃음 지으며 돌아오는 길은
왜 그리도 낯설고 멀기만 한지
저 여린 가지 사이로 혼자인 날 느낄 때
이렇게 아픈 그대 기억이 날까
내 사랑 그대 내 곁에 있어 줘
이 세상 하나뿐인 오직 그대만이
힘겨운 날에 너마저 떠나면
비틀거릴 내가 안길 곳은 어디에
*11월 1일 故 김현식의 기일을 맞아 그를 추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