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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ever Oct 27. 2022

과거를 반추하려거든 메일로 가라

feat. 항마력

브런치에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쓰기로 마음먹었다.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내가 좋아하는 걸 비교해보는 게 재미있을 것 같아서 시작하게 됐다. 마흔의 내가 과거의 나를 돌아본다는 건 꽤나 흥미진진한 소재다. 물론 손발이 오그라들 테고, 잊고 있던 기억이 되살아나 빵 터질 때도 있겠지. 무엇보다 나라는 사람의 히스토리를 정리할 수 있으니 이거야말로 1석 3조 이상의 가치가 있질 않은가.


가장 좋아하는 만화 <슬램덩크>에 관한 이야기로 포문을 열었다. 변변찮은 글빨이라 쑥스럽지만 어쩌겠나. 수양이 부족한 것을. 부끄러운 에세이나 써 재끼고 지금까지 뭐했나? 지금의 나를 탓하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과거의 나는 어떤 글을 썼었나? 고등학생 때부터 같은 메일 계정을 써왔으니 분명 그 안에 힌트가 있을 거야.


보물에 다가가는 해적의 마음으로 조심스레 웹 사이트를 열었다. 로그인을 하고 '내게 쓴 메일함'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십수 년째 봉인되어 있는 '맨 뒤로 가기' 버튼을 눌렀다. 순간, 화면에서 새하얀 레이저 광선 수천 개가 선명하게 뿜어져 나오면서 강력한 마력을 뿜어내는 영화 같은 일이 벌어지면 좋겠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대신 중요한 삶의 흔적들이 눈앞에 소소하게 자리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학교 과제들이었다. 2000년대 초반 대학 생활을 했던 내게 메일함은 지금의 클라우드와 같은 역할을 했다. 집에서 리포트나 PPT를 만들어 내게 쓴 메일함에 보내 놓고는 학교에 가서 메일 계정에 로그인한 뒤 다운로드하곤 했다. 당시에도 USB나 웹하드는 있었으나 메일을 이용하는 게 훨씬 편했다.


자연스레 당시 했던 과제들을 열어봤다. 오 마이 갓! 어느 정도 손발이 오그라들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건 너무 심하잖아. 석학이라도 된냥 최대한 있어 보이게 했던 표현들에 숨이 막힌다. 이내 빵 터져 버린 웃음. 교수들은 그런 학생들의 글을 수도 없이 볼 텐데 괜찮은 걸까? 낯간지러운 순간들을 계속 마주하다 보면 면역이 생기려나? 과거를 추적하다 뜻하지 않게 교수들의 노고를 위로한다.


대학 과제와 더불어 메일함을 가득 메운 부류는 자소서였다. 이거야 말로 항마력의 극단이 아닌가. 10년도 더 된 자소서들이 유물처럼 있었고, 파일을 여는 데 씩씩하고 굳센 마음이 필요했다. 손발을 최대한 움직여 웜업을 했다. 그것들이 너무 심하게 오그라들 때를 대비한 준비운동이었다.


컹!

웃음이 터졌고, 너무 웃다가 약간 돼지 소리 내는 듯이 코로 '컹' 하는 소리가 나버렸다. 그 소리가 웃겨서 더 크게 뒤집어졌다. 예상과 다르게 당시 글을 보니 즐거워진 것이다. 지원하는 분야에 대한 이해는 없고, 열정과 패기만 가득한 뉘앙스! 특히 '성격의 장단점' 문항에 대한 답은 너무도 창의적이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이내 '나는 과거에 이렇게 재미있는 사람이었구나'를 느낀다. 동시에 '나는 조금씩 사회화되었고 어느덧 많이 능숙해졌구나'도 깨닫는다.


이쯤에서 메일함에 있는 글을 하나 공개하련다. 그나마 봐줄 만한 에세이가 하나 있어서 다행이다. 엄청   글은 아니지만, 어설펐던 모습 그 자체에 의미가 있으니 나의 히스토리  페이지를 장식할 유산으로 손색이 없다.  




무제


어릴 적부터 궁금했다. 도대체 동전의 어디가 앞면이고, 어디가 뒷면인지. 어떤 친구는 숫자가 앞이라 하고 어떤 친구는 그림이 앞이라 하니, 헷갈리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도 나는 그림을 좋아해서 그림이 있는 면을 앞면이라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좋아한다고 그것을 앞면이라 정의할 수는 없다. 좋아해서 앞이고 싫어해서 뒤라니, 그건 영상 도식에 해당하는 좋은 예시일 뿐, 명확한 답이 될 수는 없었다. 다만 동전의 양면이 하나의 동전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이상이냐? 현실이냐?’ 그건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찾는 것과 같다. 답은 알 수 없으나 하나의 문제를 두고 고민하게 한다. 그림을 좋아해서 그 면이 앞면이 아니듯이, 이상을 택함이 곧 기쁨이고, 현실을 택함이 곧 슬픔은 아니다. 물론 현실이 곧 기쁨이라는 그 반대 상황도 마찬가지다. 이 낡은 철학적 질문의 기로에 섰을 때,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내 친구는 기타를 쳤는데, 그의 밴드는 내분으로 보컬이 없었다. 어느 날 그는 내게 축제에 설 것을 권했다. 평소 내 노래를 칭찬해 오던 그가 소위 날 ‘찜’ 한 것이다.


고민했다. 무엇보다 수능을 코앞에 둔 고3이라는 현실에 가슴이 무거웠다. ‘도전이냐, 아니냐!’ 어느 쪽도 나쁠 게 없었다. 도전은 록 밴드 보컬이라는 꿈의 실현이고, 도전하지 않더라도 대학 진학이라는 목표에 시간을 투자할 수 있다. 고민 끝에 ‘도전’을 택했다. 한 번쯤의 일탈은 큰 자산이 되리라 믿었다. 다양한 경험에서 채득 되는 지식이야말로 살아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축제를 위해 연습해온 친구의 노력을 배신하지 않을 수 있어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밴드에 임했다.


공연은 즐겁게 마무리됐다. 그러나 밴드 활동 내내 따라다닌 수능에 대한 불안은 말 못 할 슬픔이었다. 이후 일상으로 돌아가 안정감은 되찾았으나, 밴드를 그리워했다. 이 역시 말 못 할 슬픔이었다. 결국, 기쁨과 슬픔은 서로 뒤섞여 삶의 순간을 구성한다고 할 수 있다. 동전의 양면이 하나일 수 있듯이 말이다. 따라서 그것들을 따로 분리한다는 것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찾는 작업이 의미 없음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 이십대의 어느 날(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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