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12월 경기 양주시 사패산
12월 중순.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만 98세. 한국나이로 99세. 2주만 더 계셨으면 100세를 넘기는 거였는데 아쉽다...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하지만 힘든 고통을 더 견디며 세 자리 숫자만 채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할머니의 마지막 날, 병실에 함께 있었다. 괜찮으신 것 같아 방심하고 잠시 외출한 사이 할머니는 조용히 숨을 거두셨고,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려 의사가 사망 선고를 했다. 평생동안 슈퍼 건강 우먼이었던 우리 할머니는 마지막 몇 달간 이런저런 병환으로 고생을 많이 하셨다. 오랜만에 고통 없이 편안한 할머니 얼굴을 보았다.
할머니는 예쁘게 화장해 달라는 유언과 함께 할아버지 옆자리로 가셨다. 너무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 때문에 무려 38년간 떨어져 사시던 두 분은 긴 시간이 흐른 후 이제야 다시 만났다. 할머니는 물론이고 할아버지도 40년 가까이 싱글 라이프를 즐겼으면 지금쯤 총각 생활에 익숙해졌을 텐데, 갑자기 같이 살려면 혹시 불편하진 않을까? 보통은 부부가 기러기 생활 몇 년만 해도 다시 같이 살기 힘들어하던데.
그래도 삼우제 때 가 본 산소의 분위기가 편안하고 온화했다. 두 분 다 편하고 좋아하시는 느낌이라 기분이 괜찮았다.
그 공원묘지에 갈 때마다 저쪽에 멋지게 서 있는 봉우리가 하나 있다. 삼우제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때, 저기를 꼭 올라가야겠다는 충동 같은 게 들었다.
사패산이다. 내가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몰라도 저기 사패산이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산소 일대를 굽어보며 지켜주는 것만 같다.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엔 어릴 때라 못했지만 이제 할머니도 새로 입주하셨으니까 그 동네 산신령에게 잘 부탁한다고 인사라도 드리러 가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사흘 후, 크리스마스 날에 사패산으로 향했다.
크리스마스 새벽부터 중부지방에 눈이 왔다. 차를 몰고 오면서도 세상이 온통 하얀 색이었는데 산 속에 들어오니 더 하얗다. 완벽한 화이트 크리스마스다.
함흥 출신 1925년생인 우리 할머니는 그 시대 사람답지 않게 여러 손님 초대해서 스탠딩 칵테일 파티 여는 걸 좋아하시던, 신식 여성이었다. 옛날부터 쓰던 온갖 유리잔과 예쁜 그릇이 할머니 댁에 아직 한가득 남아 있다. 할아버지와 38년만에 재결합하고 일주일이 채 안 되어 맞는 첫 크리스마스가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니, 어쩐지 두 분과 잘 어울린다.
계속 흐리던 날씨는 정상께에 이르니 조금씩 개기 시작한다. 눈꽃이 화사하게 피었다. 정상석 앞 두 나무가 사이 좋아 보인다.
할머니보다 두 살 연상인 할아버지는 일본 유학까지 갔던 인텔리였다.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졸업은 못하고 귀국했는데, 당시 일본에서 보냈던 연애편지가 어딘가 남아 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문학 청년이었다는데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서 썼을지 궁금하다. 할머니 유품 어딘가에 편지가 남아 있을까? 두 분은 스물 하나, 열 아홉에 결혼하셨다.
할아버지도 등산도 하고 그랬으면 좀 오래 사셨을지도 모르는데, 몸이 약해서 늘 고생하셨단다.
할머니라고 딱히 산을 좋아했을 것 같진 않다. 어느날 갑자기 생긴 38선 때문에 남쪽에 일하러 간 할아버지와 생이별하게 된 할머니는, 1947년 1월, 돌이 채 안 된 아기를 업고 산길을 걸어 38선을 넘었다. 몇 사람이 모여 가이드를 고용한 후 낮엔 숨어있고 밤에 눈이 허리까지 빠지는 산길을 걸었다 한다. 안내하다 잡히면 고초를 겪기에 가이드는 마치 혼자인 듯 저 앞에서 걸어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멀찌감치 그 사람의 위치를 보고 따라갔다. 그러다 흔적을 놓쳐 고생하기를 여러번, 다들 발톱이 빠지도록 고생한 끝에 일행은 겨울산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왔다. 스물 넷, 스물 둘의 아직 어린 부부는 그렇게 다시 만났다.
먼저 멀리 가신 할아버지를 할머니가 뒤늦게 만나러 찾아가는 일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던 셈이다.
사패산 정상부에는 등산객들에게 음식을 얻어먹으며 사는 고양이 여러 마리가 있다.
사패산 정상석의 반대 방향이다. 저기 자그마한 야산이 공원묘지이고, 그 꼭대기 화살표 끝부분에 두 분이 누워 계신다. 좀 멀긴 하지만 조용히 마음 속으로 인사를 드려본다.
조금 더 줌인.
운구할 때는 엄청 높다고 느꼈는데 여기서 보니 편안하게 느껴질 정도로 충분히 나즈막하다.
공직자였던 우리 외할아버지는 몸이 마르고 목소리가 나긋한, 온화한 분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 어느날 외가집에 방문했던 때, 나를 한없이 따뜻하고 그윽하게 포옹해주시던 외할아버지의 손길과 느낌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무리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라도 남자끼리 그런 포옹을 하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 같다. 갑자기 기습 포옹을 당한 순간엔 나도 당황하고 불편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그 느낌이 지워지지 않는 것을 보면,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는 느낌, 포옹의 힘이란 대단하다.
땅 속에 계시니 이제 내가 반대로 안아드릴 수는 없지만 이렇게 먼 발치에서라도 한 번, 주변 환경이 어떤지 체크라도 해야할 것 같았다.
물론 내가 체크한다고 뭐 달라질 것은 없다. 당연하지만 산은 내가 오건 말건 아무 상관없이 일상을 잘 살아가고 있다. 눈이 오고, 눈이 쌓이고, 눈이 녹는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딱히 특별한 일 없이 그냥 잘 계실 거다. 이제 내려갈 시간이다.
하산길, 마지막으로 도봉산을 한번 더 바라본다. 겨울에 포대능선에 매달려 아이젠 이빨로 바위를 긁기 미안해서 못 가는 산이다.
나중에 봄이 오면 도봉산에 가야지. 자운봉 신선대 쪽은 몰라도 어쩌면 오봉 쪽에 오르면 산소가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럼, 할아버지 할머니 그 때까지 잘 계시고,
메리 크리스마스!!
(24. 1.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