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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덴의아래 Jan 09. 2024

설악산 유람

2023년 12월 설악산 천불동 - 오색





이미 이 순간부터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 저기 하얀 능선 위로 뾰족 솟아오른 세존봉과 마등봉. 내일 저녁이면 저 꼭대기에서 일몰과 일출을 맞이할 것이다. 두근두근.


12월의 마지막 주 평일날. 주차장과 소공원엔 어린 아이를 데리고 나들이 온 가족이 많았다. 방학을 맞은 젊은 연인들은 손을 꼭 잡고 얼어붙은 눈 위를 조심조심 걸어다녔다. 미소띤 눈을 선글래스 아래로 감춘 장년층 단체 관광객들은 휴대폰으로 사진찍기에 바쁘다.


젠장. 같이 사이좋게 어울려 다니는 사람들이 엄청 부럽군.... 조금 전 설레던 마음을 잠시 망각하고 강력한 부러움에 휩싸였다. 물론, 이런 산행을 같이 다닐 수 있는 사람은 애초에 극히 제한적이니 숙명 같은 거라고 생각해야 한다.


등산객처럼 보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시간은 정오. 겨울 평일에 설악산을 오르는 심각한 산꾼들은 이 시간에 산 속에 있지 소공원에 있을 리가 없다.


신흥사를 지나 비선대 가는 산책길로 접어드니 사람이 확연히 줄었다. 나무숲 사이 조용한 눈길의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 저쪽에서 요염한 포즈의 여자를 남자가 공들여 사진에 담는, 한눈에 보아도 너무너무 사이 좋은 중년 커플의 알콩달콩 사랑의 대화가 한적한 산책길을 타고 퍼져 온다. 빨리 지나가 주어야겠지,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확확 걸어서 지나가다 커플 코앞 1.5 미터  지점에서 아이젠에 신발끈이 걸려 와장창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어이쿠."


아저씨가 사랑의 눈빛을 거두고 놀란 눈으로 땅바닥의 나를 내려다보며 감탄사를 내뱉는다. 26kg짜리 배낭이 등에 달려 있으니 얼른 일어서지지도 않는다. 이따만한 배낭을 메고 완벽한 산악인 행색으로 겨울산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는데…. 날 보고 소리내어 웃지 않은 것만 해도 내 입장에선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이게 신발끈이 걸려서 어쩌구저쩌구, 묻지도 않았는데 괜히 설명을 하다보니 얼굴이 더 화끈거린다. 안 하면 더 좋았을 말을...


설악산에 대한 설레임과, 사이 좋게 놀러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과, 2박 3일 산행 계획에 대한 부담감과, 걷다 말고 자빠진 부끄러움, 이 모든 감정들은 비선대 다리를 건너 등산로로 접어들어서야 사라지고 마음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천불동 계곡의 흔한 겨울퐁경 1



천불동 계곡의 흔한 겨울풍경 2


12월 마지막 주는 일주일간 회사 휴무다. 혹시나 해서 이틀 전 국립공원 대피소 예약 사이트에 들어가 보았더니 세상에, 모든 대피소에 다 빈자리가 많다. 평일은 원래 이런 건가? 아니면 희운각과 소청 대피소가 새로 오픈해서 여유가 많은 것일까?


어쨌든 덕분에 오늘은 양폭까지만 가면 된다.


양폭을 향해 올라가는 이 길에 올 때마다 Stairway to Heaven이라는 노래 제목이 생각난다


양폭 대피소와


그곳에 앉으면 보이는 풍경.


원래 계획은 오늘 양폭 대피소에서 1박을 하고, 내일 공룡능선 지나 마등령 꼭대기에서 하루밤 더 지내는 것이다. 지난 번 갑자기 무산되었던 마등봉 가을 백패킹 https://brunch.co.kr/@560d8fe33aad457/32 의 재도전 산행이랄까. 이를 위해 2박 3일짜리 배낭을 챙겨 왔다. 그런데....


"공룡이요? 거기 못 가요. 아직 길이 안 뚫렸어요."


양폭 산장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말이다. 눈 온지 열흘은 된 거 같은데 아직 길이 안 뚫렸다고?


대청-한계령도 아직 통제 중이고, 소청-백담사도 통제 중이다. 국공 직원들이 눈길 뚫어줄 때까지 출입 통제하는 관리행태를 투덜거릴 게 아니라, 그나마 천불동과 오색 길이 뚫려있는 걸 고맙게 생각해야 할 상황인 것 같다.

 

모처럼 설악산 2박을 계획하고 왔는데 그렇다고 집에 일찍 갈 수는 없는 노릇. 휴대폰으로 예약사이트에 들어가서 다음날 소청 대피소 한 자리를 예약했다. 평일이 좋긴 좋다.


이렇게 하여 결과적으로, 남들이 당일로 주파하는 천불동 - 대청봉 - 오색 코스를 무려 2박 3일에 걸쳐 유람하게 되었다.







양폭에서 소청 대피소까지, 보통 4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다. 느즈막히 출발하고 중간에 셀카놀이를 충분히 했는데도 너무 빨리 도착했다. 국립공원 대피소에도 체크인 시간이 있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오후 3시 전에는 입실을 시켜주지 않는다.



하다보면 좀 부질없어지는 셀카놀이. 소청 오르막길.



소청봉에서 용아장성릉 방향. 사람 대신 배낭으로.


눈에 파묻힌 소청대피소와


그 앞 나무 테이블에 앉으면 내려다보이는 용아장성.



석양의 소청대피소 화장실. 각도상 화장실을 찍을 수밖에 없다.


소청 대피소의 밤은 너무 힘들었다. 어찌 그리 더울 수가....


맹렬한 난방으로 한껏 덥고 후덥지근하게 만든 다음에 저녁 8시에 소등하고 자라고 하는데, 술을 마시면 과태료라고 하지, 땀이 삐질삐질 나는데 남녀 이용객이 다 있으니 옷을 마음대로 벗을 수도 없지....


모든 것이 꽝꽝 얼어붙는 혹한의 겨울 텐트 안이 너무도 그리웠다.


자는둥 마는둥, 새벽 네 시 반에 짐을 꾸려 대피소로부터 대피했다.



덕분에 소청봉의 겨울 야경을 보았다. 보름달이다.


소청 대피소에서 20분 오르막인 소청봉엔, 이 시간에 올라와서 사진을 찍는 사람이 나 말고도 또 있었다. 힘겨운 밤을 보낸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나보다.



곧 동해의 일출이다. 중청에서 보는 대청봉.



조용한 아침의 셀카


사람 없는 대청봉 정상석은 오랜만이다. 평일의 힘이다.


점봉산 정상에 못 가본 지 너무 오래되었다. 그리운 곳이다. 뒤의 긴 능선은 방태산.



이틀 밤을 대피소에서 잤다. 그럴 거 치고는 지나치게 많은 짐을 가져오긴 하였으나, 그리고 잠을 제대로 못 자긴 하였으나, 설악산의 풍광은 압도적이다. 그것으로 되었다.



오색으로 향하는 길에서. 이런 곳에서 내려가기 아쉽다.



그래, 이 정도면 한 해의 마무리 산행으로 괜찮았다.


이번에 못간 곳은 다음에 가면 된다. 내가 변해서 문제이지, 산은 시간이 간다고 변하지 않으니까.



(24.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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