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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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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덴의아래 Feb 21. 2024

운장산의 겨울

2024년 2월 전북 진안군 운장산


목요일, 회사 출장으로 방문한 전북 익산, 회색 구름 아래 비와 우박이 마구 쏟아졌다. 날씨도 다시 추워졌다.


강원도에 눈이 내린다는 뉴스도 있었다. 시내가 이 정도로 춥고 얼음 알갱이 섞인 비가 내린다면 높은 산엔 당연히 눈이 올 것이다. 이 어두운 구름이 물러가고 내일 해가 뜨면 눈 덮인 산이 햇살에 하얗게 반짝이겠지. 차갑고도 달콤한 상상이 머릿속에 펼쳐졌다.


야영 준비를 해 갔다가 길이 안 뚫려 있어 대피소에서 자거나 그냥 하산하는 허탕을 올 겨울에 무려 세 번이나 쳤다. 두 번은 혼자여서 감히 러셀할 엄두를 못 내고 포기했고, 나머지 한 번은 두 명이 하루종일 길 뚫다가 오후가 늦어가도록 좁은 계곡을 못 벗어나길래 포기하고 하산했었다.


익산의 날씨로 보아 주말 산행지로 전북 쪽이 괜찮아 보였다. 혼자 강원도 산에 가서 러셀하긴 너무 어려울 것 같고, 이쪽 지역이라면 적당히 눈이 왔을 것 같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 제일 높은, 천 미터 넘는 운장산을 타겟으로 정했다. 혹시라도 발자국 없는 눈길을 뚫어야 한다면 시간이 오래 걸릴 테니 토요일 새벽 일찍 집에서 출발하자. 계곡에 들어갔다가 지난번처럼 눈더미에 고생할 지도 모르니 코스는 무조건 능선길로 잡자.  


계획이 완벽했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배낭에 스패츠와 방수 미튼(덧장갑)도 신경써서 챙겼다.





진안군청 사이트에서 가져온 운장산 겨울 사진이다. 이런 산을 상상하며 새벽부터 차를 몰고 진안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현실은...





맨땅과 물웅덩이.




그리고 발이 푹푹 빠지는 진창.


익산 시내에 차가운 겨울비가 내릴 때, 천 미터 넘는 산에도 똑같이 차가운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기온은 섭씨 10도 정도?  너무너무 따스한 오후였다.


설산 경치가 좋으면 구봉산까지 10km 종주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맨땅을 보고 산행 의욕을 상실해 버렸다. 아직 점심 시간임에도 운장산 서봉(칠성대, 1120m)에 눌러 앉았다. 이왕 왔으니 충분히 놀다 가기로 마음 먹었다.


주말을 맞아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다. 비슷한 시간대에 산악회 버스 몇 대가 한꺼번에 왔나보다. 농담과 음담패설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산악회 중년 남녀들의 대화가 왁자지껄했다.


점심을 다 먹은 단체 산행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산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서봉에 배낭을 벗어 놓고 정상 거쳐 동봉까지 맨몸으로 왕복했다. 저 멀리 눈 덮인 덕유산이 멋졌다. 설경을 보려면 덕유산 정도는 올라가야 했었나보다.  




저어기 공터에 있는 게 사람인가 바위인가 긴가민가해서 카메라 망원 줌렌즈로 당겨보니 사람 두 명이다. 뷰파인더 안에서 덕유산을 배경으로 점심을 먹고 있는 커플이 다정하고 멋져 보인다.





틈틈이 오가는 산행객들 때문에 민망하기는 해도, 이쪽에 삼각대를 세워놓고 저쪽까지 왔다갔다 하며 셀카놀이를 좀 했다. 설경이 아니어 아쉽지만 그래도 충분히 멋지다.




오후가 늦어가며 인적이 끊겼다. 텐트를 쳤다. 멀지만 덕유산에라도 눈 덮인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다.


토요일이라 다른 백패커들이 좀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한 명도 없다. 저기 텐트 위로 보이는 정상(운장대)의 나무 데크에도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설마 오늘 내가 이 산을 독차지하는 건가, 잠시 설렜는데 아저씨 두 분이 어마어마하게 무거워 보이는 배낭을 메고 헉헉대며 올라오신다. 사진 찍는 분들이다.


내 눈에 좋아보이는 곳이 남 눈에도 똑같이 좋아 보이겠지. 내 바로 옆에 같이 텐트를 쳐도 되냐고 하길래 그러시라고 했다. 산이 내 것도 아닌데 싫다고 할 권리도 내게 없거니와 좋은 건 같이 즐겨야 하니까. 게다가 어차피 다른 지점들은 물컹한 진흙탕이라 텐트 피칭할 공간이 마땅치 않았다.


간혹 경치 좋은 곳에 자기들 텐트 치고 남는 공간 한가운데에 대형 타프를 떡 설치해서 남들 못 오게 독차지하는 꼴불견 백패커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산 좋아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혼자였으면 더 좋았겠지만 이렇게 보니 사이좋게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도 나쁘진 않아 보인다.


그렇게 해가 지고 밤이 찾아왔다.






진흙 바닥 때문에 바위 위에 텐트를 올려두었기에 펙을 박지 못했다. 밤새 바람이 엄청나게 불었다. 텐트가 휘청휘청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바위면 저쪽으로 조금씩 밀려가는 것만 같았다.  잠시라도 밖에 나갔다가는 빈 텐트가 바람에 휙 날아갈 것이 거의 확실해서 내내 텐트 안에서 뒹굴었다.


요란한 바람 덕에 옆 텐트 코 고는 소리 따위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이번에 가져온 텐트는 몽벨 싱글월 2P (제품명 U.L. 돔 쉘터 2) 인데, 얼마 전에 새로 장만한 거다.


카메라 때문에 어떻게든 짐 무게를 줄이고 싶은데, 플라이가 없는 싱글 월(홑겹) 텐트를 쓰면 1kg 가까이 줄일 수 있었다. 아직 싱글월 텐트는 써 본 경험이 없었기에 매장에서 망설였다.


"싱글 월은 결로가 많이 생긴다던데, 괜찮을까요? 플라이 있어도 한겨울엔 물이 맺혀 침낭이 다 젖고 그러던데..."


"어느 정도 결로가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이 제품은 확실히 다른 것들보다 덜합니다."


"그래요?"


"네. 이 소재가 다른 회사에서 안 쓰는 무어무어라 부르는 소재인데.....(후략)"


소재가 달라서 텐트 벽에 물기가 덜 맺힌다는 얘기였다.


정말? 결로라는 건 안팎의 온도차 때문에 생기는 건데 천의 소재와 관련이 있나? 반신반의하면서 구매했었다.


알고 보니 텐트 양쪽으로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어 바람이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매쉬 망이 있는 구멍을 버팀대가 강제로 벌리고 있어서 닫을 수가 없다. 텐트 안의 온도와 습도가 바깥과 똑같은데 결로가 생길래야 생길 수가 없겠지. 결론적으로 천 소재 때문이 아니라 텐트 바깥과 똑같이 추웠던 이유로 결로는 하나도 생기지 않았다. 춥고 뽀송뽀송할 것인가, 따뜻한데 축축할 것이냐의 선택인 셈이다.  


밤이 되며 0도 정도로 기온이 내려갔다. 텐트 안에도 0도의 바람이 휭휭 불었다. 겨울에 갖고 다닐 텐트는 아닌 것 같다. 게다가 무슨 조화인지 바닥에선 전파가 안 잡히고, 손을 뻗어 바람 들어오는 구멍에 핸드폰을 갖다대면 전파가 잡혔다. 카톡 하나 보낼 때마다 손이 엄청 시렸다.






화장실 때문에 더 못 버티고 새벽 4시에 밖으로 나왔다. 바람에 날아갈까봐 아예 텐트를 걷어 버리고 멀리 전주의 야경을 감상하며 일출을 기다렸다.







저기 덕유산 뒤에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고 누군가 아래에 숨어서 주황색 간접조명을 쏘는 것만 같았다. 점점 강렬해지는 조명. 그러다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눈부신 태양이 쏙, 미끄덩, 바람을 뚫고 떠올랐다.


내가 아침잠이 많은 사람이라 볼 기회가 적어서 그런가? 해 뜨는 장면은 볼 때마다 신기하다. 멋지고 장엄하다.


짐을 챙겼다. 하루밤 잘 놀았으니 이제 내려갈 시간이다. 올라가서 잠만 딱 자고 내려오는 산행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나뭇잎도 꽃도 눈도 아무것도 없는 맨땅 산길을 굳이 걷고 싶은 의욕은 이미 어제 상실했다. 구봉산까지의 긴 산길을 별 감흥 없이 걸어버리기보다는 다음을 위해 아껴 두자.


배낭을 다 꾸리고 일어섰다. 눈을 들었는데 구름 위로 올라간 태양이 거대한 UFO처럼 덕유산 일대에 광선을 내리쬐고 있다.

 


 




영화에 보면 저런 광선 속으로 사람이 끌려 올라가던데.


외국은 어떨지 몰라도 한국에서는 이 새벽 시간에 산 속에 돌아다니는 백패커들부터 끌려 올라갈 것이다.  어쩌면 국립공원공단과 산림청의 공무원들이 제일 기뻐할 지도 모르겠다.









세상엔 부지런한 사람들이 많다. 해 뜬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20명쯤 되는 단체 산행객들이 정상에 올라왔다. 산 아래 등산로 입구에서 아직 어두울 때 출발했나?  아무리 가까운 지역에서 왔다 해도 집에서 도대체 몇 시에 나온 건지.  



오늘은 구름이 많이 끼었다.  너무 일찍 내려가는 게 아쉬워서 둘러보는데 저쪽 북동쪽 방향 구름 위로 살짝 고개를 내민 봉우리가 보인다. 내가 아는 산인가? 찾아보니 충북 영동의 백화산이다.




조금 더 줌 인.


화살표는 주행봉이다. 봉분 낮은 누군가의 무덤이 평평한 봉우리를 지키고 있는 곳이다. 지난 여름 말미의 어느날 나는 그 무덤 옆에서 하루밤 자고 왔었다. https://brunch.co.kr/@560d8fe33aad457/30



그날 아침 해 뜨는 순간은 운무 때문에 보이지 않았지만 구름이 걷히자 장엄한 풍경이 펼쳐졌었다. 오늘의 붉은 일출도 주행봉에서 보였겠지? 무덤 안에 누워 계신 그 분도 오늘 나와 같은 일출을 보았을 것 같다. 어르신, 잘 지내고 계시죠?


그날 아침 주행봉에서 떠나며, 백화산 종주 길에 다시 방문하겠노라고 무덤에 대고 얘기했었다. 단지 등산을 다니는 것일 뿐인데도 이런저런 지켜야 할 약속들이 늘어난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수요일, 창 밖 서울 시내에는 지난 주 목요일의 익산처럼 눈 섞인 비가 내리고 있다. 그리고 지난 주 익산에서와 똑같이 나는 이번 주말 눈 쌓인 산에 갈 생각에 들떠 있다. 일주일의 시간이 리셋되어 반복되고 있다. 이번엔 눈 내린 지역을 확실히 체크하고 찾아가야지.


이렇게 저렇게, 산에 가야 할 이유는 늘어나기만 한다.




(2024.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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