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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deal Jun 08. 2024

비 내린 후

비가 내릴 땐 비릿한 냄새가 풍겨온다.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류장에 하나둘씩 모여드는 사람들과, 기다림. 각각 다른 형태의 기다림을 띄고 있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한 여정, 고된 하루의 시작 또는 하루의 끝. 버스가 다가오면, 각자 다른 무게의 발걸음으로 올라탄다.

자리가 생겨 앉았다. 봄이라기엔 습한 날씨에 땀이 흘렀다. 몇 정거장이나 스쳤을까, 그때 버스에 올라타는 한 남자. 무거운 발걸음, 구부정한 허리,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그 남자는 하필이면 내 옆에 선다. 나는 뒤를 돌아봤다. 버스엔 빈 좌석이 많았다. 도대체 어떤 무게를 가졌길래, 차마 저 뒤편까지 걸어가지 못했을까.

나는 그의 무게 앞에 무너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버스 손잡이를 잡았다. 그는 빈자리와 나를 번갈아가며 훑었다. 그리곤 그 자리에 앉았다. 나를 올려다보며 해맑게 웃어 보이는 남자. 나는 살짝 미소 지어 답했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웃음을 유지했다. 나는 그 소리 없는 웃음이 멈췄으면 했다. 당신도 그랬을테잖아. 젊은 날의 당신도, 누군가의 무게 앞에서 굴복했었잖아. 당연했으면 좋겠다. 이 순환에 노력과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으면 한다. 타인의 무게를 저울질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들지 않았으면 한다.

노인들의 웃음에는 짙은 향기가 있다. 세월에 빚어진 주름은 그 웃음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든다. 그래서 정말 그 웃음이 멈췄으면 했다. 그 웃음이 꽤나 아름다웠지만, 너무 슬펐다. 야속하게 흘러가버린 그의 시간, 그 깊이를 헤아리기엔 너무 얕은 나의 주름.

한 정거장을 더 가야 했지만, 하차 벨을 누르고 버스에서 내려 걸어갔다. 비가 내린 뒤엔 씁쓸한 향기가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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