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현대문학의 거장 위화의 책 '인생' 리뷰
중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위화의 소설 ‘인생’은 1996년 첫 출간후 국내에서도 세대를 뛰어넘어 꾸준히 큰 사랑을 받아온 명작이다.
줄거리는 부잣집 지주의 아들 푸구이가 노름으로 전재산을 탕진한 후 가족과 살아가던 중 국공내전과 문화대혁명과 같은 중국사의 대혁명기를 거치면서 부모와 아내, 아들, 딸, 사위와 손자, 친구까지 모두 잃고 인생을 묵묵히 살아간다는 이야기이다.
역사의 흐름에 반하지 않고 물 흐르듯이 살아가는 푸구이의 삶을 통해서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첫 번째는 ‘인생의 의미’이다.
이 소설은 다분히 실존주의 철학을 표방한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고 말했듯이
개개인의 삶은 실존 그 자체로 어떠한 본질(목적) 없이도 소중하고 유일무이하다.
인간은 무의미한 삶에서 의미를 만들고, 목적 없는 삶에서 합목적성을, 부조리한 삶에서 합리성을 만들어내면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공리 주연 장예모 감독의 동명 영화에서는 아내와 사위, 손자가 마지막까지 살아 남음으로써
조금은 따뜻한 휴머니즘의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이는 위화 작가의 의도에 반한다.
소설에서는 마지막 순간 아끼던 손자까지 죽음으로 잃은 후 늙은 소에게 자신과 가족들의 이름을 모두 붙이며 살아가는 어쩌면 끔찍하고 충격적인 노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모든 가족을 잃었지만 늙은 소로 상징되는 소중했던 추억만을 간직한채 살아가는 푸구이의 삶은 자신의 인생을 제 3자의 눈으로 관조적으로 바라본다.
‘사람은 그저 평범하게 사는 게 좋은 거야. 아옹다옹해봐야 자기 목숨이나 내놓게 될 뿐이라네. 나를 보게나. 말로 하자면 점점 꼴이 우스워졌지만 명줄은 얼마나 질기냔 말이야. 내가 아는 사람들은 하나가 죽으면 또 하나가 죽고 그렇게 다 떠나갔지만, 나는 아직 살아 있지 않은가.’
이 말은 가늘고 길게 살아온 자신의 삶에 우쭐해 하는 이기적인 모습이 아니라 반어적 표현이다.
모든 가족을 잃고 무의미해진 삶 속에서도 의미를 만들어 내려고 노력하는
‘생각하는 갈대’와 같은 실존주의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두 번째는 ‘사랑의 흐름’이다.
사랑은 회피형, 불안형, 안정형으로 나뉜다.
회피형은 상대와 존재 그 자체로 공감을 이루지 않고 자신만을 사랑하는 나르시스트적 사랑,
불안형은 상대에게 끊임없이 인정받기를 원하고 자신도 상대를 필요 이상으로 사랑함으로써
자신의 불안을 회피하려는 헌신적 사랑,
안정형은 상대를 소유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존중해서 하나의 마음이 되는 완성된 사랑이다.
초반에 난봉꾼이고 노름만 하는 한심한 푸구이를 등장시킨 이유는 자신만의 욕심을 위해 살아가는 나르시스트적 회피적 사랑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다음에는 가족들과 따뜻한 정을 나누면서 사소한 일상에서도 행복을 느끼는 푸구이가 헌신적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뒤늦게 깨닫게 된다.
마지막으로 가족이 모두 죽은 후 푸구이는 가족의 존재 자체만으로 가장 행복했고,
이제 소를 통해서 그 추억만으로도 말없이 관조적으로 살아가는 완성형 사랑을 이룬다.
완성형 사랑은 한번 죽고 두 번 부활한다.
이기적인 자기애를 죽이고 상대를 자신처럼 사랑할 때 첫 번째 부활을 하고,
상대가 나처럼 나를 사랑함을 느낄 때 두 번째 부활을 하면서 완전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비록 사랑하는 상대가 죽음으로 인해 살아 생전 만나지 못할지리도.
세 번째는 ‘죽음의 의미’이다.
죽음은 사건의 종결이 아니라 존재의 종결이다.
뉴스에 나오는 타인(그)의 죽음, 가까운 지인(너)의 죽음, 함께 생활하는 가족이나 사랑하는 이의 죽음(우리)은 의미가 각각 다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그’나 ‘너’의 죽음이 아닌 ‘우리’의 죽음이다.
사랑하는 이가 죽으면 ‘우리’는 부숴지고 ‘나’만 홀로 덩그러니 남게 된다.
죽지 않을 이유 중의 하나는 사랑하는 이(우리)의 슬픔 때문이다.
우리의 죽음으로 인해 마지막 슬픔까지 모두 공중으로 수증기처럼 증발시켜버린 푸구이에게는
이제 죽을 이유도 죽지 않을 이유도 없다.
그가 펑생을 체재에 반항하지 않고 살아왔듯이 물 흐르듯이 살아가는 것 자체만을 목적으로
묵묵히 남은 인생을 살아갈 뿐이다.
위화의 ‘인생’이라는 책은 이처럼 인생의 의미, 사랑의 의미, 죽음의 의미 3가지를 다시 한번 심도있게 깨닫게 해 준 명작이었다.
장예모 감독의 영화는 3가지의 의미 모두 책처럼 크게 와 닿지 않았고 특히 작가의 실존주의적 사고의 전달을 왜곡시켜서 감동이 희석되었다
인생과 사랑은 정답이 아니고 대답이라고 한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있음에 감사하고, 나를 사랑해 주는 이들이 있음에 기뻐해야겠다.
그들과의 대화와 대답을 정답처럼 소중히 여기고 무의미한 인생 속에서 소중한 의미를 찾으면서 사는 것이 ‘인생’이라는 책이 주는 진정한 교훈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