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로 행복해지는 방법>
독서를 이렇게 하면 능동적으로 행복을 창조할수 있습니다. 차원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독서법!
책을 읽은 후 스토리텔링을 스스로 하기 위해서는 여러 거인들의 어깨가 필요합니다. 거인을 만들고, 거인을 일어서게 하고, 거인을 움직이게 한후 거인들의 어깨 위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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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너와 같이 놀수 없어. 나는 길들여지지 않았거든.’
‘길들인다는게 뭐야’
'관계를 맺는다는 거야.
네가 나를 길들이면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될거야.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하나뿐인 존재가 되는거야’
어린왕자와 여우의 대화입니다.
독서도 이와 같습니다.
어떻게 길들이는가에 따라서 단순한 취미생활일수도 있고, 책을 통해서 거인을 만들고, 거인을 걸어가게 하고, 거인의 어깨 위에 서서 함께 걸어가면서, 나의 지적능력을 향상시키는 색다른 즐거움을 느낄수도 있습니다.
독서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4가지 차원을 거쳐야 됩니다.
1차원은 직선, 2차원은 평면, 3차원은 입체, 4차원은 입체가 시공간을 헤치고 걸어나가는 것입니다.
칸트에 관한 책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첫 번째 책을 읽을때는 1차원적인 칸트의 지식을 얻을수 있습니다.
만약 좋은 책이라고 느끼면 같은 책을 2번째 읽을때는 밑줄을 쳐두고, 3번째 읽을때는 밑줄친 구절을 중심으로 스스로 노트에 정리를 해 둡니다.
그 다음에는 내가 노트한 것을 반복적으로 읽어보면서 구구단을 외우듯이 암기한후, 스스로 칸트를 스토리텔링할수 있게 되면, 칸트라는 거인이 2차원 평면에 도식화 됩니다.
이제 2차원 평면에 있던 칸트라는 거인이 3차원 입체로 일어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노트에 적혀 있던 거인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공자, 소크라테스, 석가모니,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여러 거인들이 평면에 있던 칸트의 팔을 붙잡고 일어서면 이제 다 함께 3차원의 현실 속의 거인들이 됩니다.
이 거인들이 멈추지 않고 걸어가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타야 합니다.
여러 거인들의 어깨를 번갈아가면서 올라타고 서로 어깨동무를 할수 있게 만들게 되면, 여러분은 거인들과 함께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갈수가 있습니다.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돈오돈수와 돈오점수 두가지 논쟁이 있습니다.
'돈오'는 단박에 깨닫는 것을 의미하고, '점수'는 점진적인 수행을 말합니다.
한번 깨달으면 더 이상 책 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 성철스님이 주장한 돈오돈수이고, 깨달은후에도 계속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 지눌스님이 주장한 돈오점수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독서법을 잘 길들이면, 점수후에 돈오가 오고, 돈오 후에 지속적인 점수를 통해서, 계단식의 또다른 돈오를 경험하게 됩니다.
즉 첫 번째 점수는 읽고 정리하고 외워두는 독서법으로 2차원 평면의 거인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여러장의 거인들을 노트에 그려두면 어느 순간 여러 거인들의 손이 서로 연결되어서, 3차원 입체적으로 함께 일어서는 돈오의 순간이 옵니다.
이는 마치 어두운 동굴속에서 횃불을 켜는 순간 단박에 동굴 속의 모든 것이 보이는 깨달음을 얻는 것과 같습니다.
이 거인들과 함께 걸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연결되어 있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원하는대로 올라타야 하고, 거인들의 시야로 세상을 함께 바라 보게 되면 새로운 세상을 끊임없이 바라볼수 있습니다.
이렇게 독서를 하면 책을 읽을때마다 땀 흘린후 샤워하는 느낌처럼 머리 속이 시원해짐을 느낄수가 있습니다.
마치 63빌딩 건물에 몇 개의 방만 불을 켜다가 전체 방의 불을 켜는 방법을 익히게 되면, 모든 거인들의 방이 서로 통해 있음을 알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방법을 익히면 새로운 책을 읽을 때마다 여러 명의 잠자던 거인들을 깨워서 함께 걸어갈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실존과 본질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어떻게 차원을 바꾸어 나가는지 알아 보겠습니다.
실존과 본질이라는 단어는 차원에 따라 3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먼저 2차원 평면적으로는 실존이란 존재한다는 뜻이고, 본질이란 목적이 있다는 뜻입니다.
3차원 입체적으로 보면 실존과 본질은 서로 도움을 받아 입체적으로 함께 일어서게 됩니다.
본질은 형용사이고 실존은 명사로 서로 연결됩니다.
책을 읽는 나, 일을 하는 너, 토끼를 사냥하는 사자, 물 마시기 위한 컵 등 실존과 본질은 서로 연관되는 문장을 만듭니다.
이것이 스토아 학파에서의 실존과 본질에 대한 해석입니다.
마치 내가 3인칭 관찰자의 입장으로 형용사와 명사로 존재하는 세상, 실존과 본질인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고대 스토아 학파 이후 중세와 근대를 지나서 현대철학에 이르러서 실존주의 학파에서는 실존과 본질은 그 뜻이 달라지게 됩니다.
4차원으로 걸어간다는 것은 내가 세상만을 바라보다가 우연히 나를 바라보게 됨을 뜻합니다.
내가 3인칭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스스로 성찰하면서 되돌아 본다는 것이 실존주의 학파에서의 실존과 본질의 해석입니다.
그러므로 스토아 학파에서는 인간과 동물 모두 실존과 본질이 있지만, 실존주의 학파에서는 인간은 실존만 있고, 동물과 무생물은 본질만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성찰하므로 실존만 있지만, 인간이 본질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페르소나 때문입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나, 독서하는 나, 직장인으로써 열심히 일하는 나, 가족을 부양하는 나라는 페르소나, 즉 가면을 계속 바꿔가므로 그것은 실제적인 본질이 아닙니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세상에 태어났고, 태어났기 때문에 살아가는 나의 실존만이 있으므로, 끊임없이 새롭게 변해가는 본질을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이 실존주의 사상입니다.
실존주의에서는 동물은 본질만 있고 실존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 성찰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토끼는 뛰기 위해서 있고, 컵은 물을 마시기 위해서 있고, 사자는 토끼를 잡아먹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그들의 본질을 그렇게 규정한 것이지 그들이 실존하는 존재, 즉 스스로를 성찰하는 존재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즉 실존주의란 나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을 뜻하고, 실존이란 나를 돌아보면서 성찰할수 있는 능력을 갖춘 존재를 뜻합니다.
그러면 타인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나의 입장에서는 관찰당하는 대상이므로 토끼와 같이 본질만이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그들도 나처럼 실존하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타인을 고정된 ‘즉자’가 아닌 나처럼 자신을 성찰할수 있는 존재인 ‘대자’이므로 ‘대타자(라캉이 사용한 단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상대를 보듯이 상대도 나를 본질로만 보기 때문에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처럼 책을 읽을때는 1차원에서 4차원으로 스스로를 순차적으로 업그레이드 시키고, 점수 후에 돈오, 돈오 후에도 끊임없이 점수를 통해서 새로운 돈오를 하는 방법으로 스스로의 독서법을 길들여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동굴 속을 단박에 밝히는 횃불의 순간이 올 뿐만 아니라, 63빌딩 전체의 방을 환하게 하나로 서로 연결시키는 독서법을 통해서 거인들과의 즐거운 산책을 함께 즐길수가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