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나만의 방공호"
동네에 작은 카페가 있다.
간판에는 나무판에 하얀 페인트로 단어 두 개만 적혀 있다.
‘안녕.’
"안녕!"
나도 매일 인사를 하고 들어간다.
문 앞에는 계절마다 바뀌는 화분이 놓인다. 겨울엔 빨간 열매 달린 나무, 봄엔 라벤더, 여름엔 수국, 가을엔 노랗게 물든 국화.
안에 들어서면 늘 은은한 때 지난 팝송이 흐르고, 벽에는 오래된 필름카메라 사진이 빼곡히 걸려 있다. 커피 볶는 고소한 향이 공기를 가득 메우는데, 오래 앉아 있으면 마음까지 기분 좋게 볶이는 느낌이다.
"흠... 이 맛이지!"
창가는 유리창이 낮게 나 있어 바깥 풍경이 가깝게 보인다. 버스가 지나다니는 소리, 자전거 벨 소리, 길 건너 꽃집 앞의 분주한 손길까지. 세상과 단절되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거리를 둔 안전한 ‘프레임’ 속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든다.
나는 이 카페 ‘안녕’을 고집한다. 단순히 자리가 편해서가 아니다. 내 자리— 이른바 ‘방공호 자리’는 창가 맨 끝, 구석에 기댈 수 있는 의자와 벽이 있는 곳이다. 거기 앉으면 세상과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방패가 생긴다. 주문을 바꾸지 않아도,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하지 않아도, 사장님은 커피를 내리고, 나는 그걸 받으면 된다. 세상과의 관계가 이렇게 단순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그냥 나를 이곳에 머무르게 한다.
***♡***
날씨가 흐리긴 했지만, 우산을 챙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집을 나섰다. 그런데 하늘이 갑자기 잿빛으로 변하더니 순식간에 굵은 빗방울이 쏟아졌다. 나는 허겁지겁 ‘안녕’의 문을 열고 뛰어 들어갔다.
문 위의 작은 종이 ‘딩’ 하고 울렸다. 그 순간, 바깥의 빗줄기와 안쪽의 음악이 맞부딪혔다. 스피커에서는 1970년대 올드 팝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거칠지만 부드러운 목소리, 잔잔한 기타 스트로크, 뒤에서 받쳐주는 브러시 드럼. 비의 리듬과 음악의 박자가 겹치면서, 귀가 포화 상태로 차올랐다.
바깥은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리드 파트를 맡고, 안은 커피 머신의 스팀 소리가 베이스를, 올드 팝송이 그 위에 보컬로 얹혔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한 곡으로 편곡된 듯한 순간이었다. 사장님이 웃으며 말했다.
“딱 들어오자마자 비가 오네요.
타이밍 좋으셨어요.”
그런데 — 내 ‘방공호 자리’에 모르는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 자리는 세상으로부터 살짝 숨어드는 비밀 통로 같은 곳이었다. 시선이 멈추는 순간, 오늘 하루의 방패가 함께 무너진 듯했다.(아, 오늘은 사회와 직접 맞서 싸워야 하는 날인가?) 우울했지만 나는 최대한 쿨한 척 다른 자리에 앉았다.
바로 앞 테이블에 앉은 커플이 셀카를 찍었다. 렌즈가 잠깐 내 쪽을 스쳤지만, 연인들의 카메라 각도는 늘 알 수 없으니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슬쩍 보니 사진 속 나는, 지인도 아닌데 왠지 ‘단골손님 엑스트라’처럼 나와 있었다. 입술이 열렸지만 (부러우면 지는 거다. 하지만… 져도 괜찮을 만큼 예쁘네.휴우~!) 시선은 닭살이 대신했다.
잠시 후, 내 앞에 ‘안녕’의 아메리카노가 도착했다. 이 집 커피는 다르다. 쓴맛 뒤에 은근히 퍼지는 달콤함, 끝맛은 볶은 견과처럼 고소하다. 첫 모금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자리를 잃은 허전함이 서서히 녹아내렸다. 오늘은 커피가 새로운 방공호가 되어준 셈이었다.
창밖을 보며 커피를 천천히 마셨다. 빗줄기가 한 줄 한 줄 유리창을 타고 내려가며 세상과 나 사이에 반투명한 장막을 드리운다.
밖은 갑작스런 비로 소란스러운데, 내 컵 안의 커피는 뜨겁고 고요하다. 아마 내가 ‘안녕’을 고집하는 건, 세상일이 갑자기 쏟아져 내려도, 이 안에서는 아무 일 없는 듯 이 특별한 커피의 맛과 온기를 온전히 누릴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내 자리의 소중함을 더 알게 되었다.
***♡***
며칠 뒤, 친구한테 전화가 왔다.
“야, 왜 연락 안 받아?
생일인데!... 만나야지...”
순간, 내가 오늘이 내 생일이라는 사실을 깜빡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평소처럼 ‘안녕’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보고 있었는데, 세상은 내 생일을 알고 있었고, 나만 몰랐다. 이상하게도 서운함보다 웃음이 먼저 나왔다. 어쩌면 오늘이 평소와 다르지 않아서 더 좋았는지도 모른다.
그날 밤, 친구가 보내준 단체사진을 SNS에서 보다가, 우연히 ‘추천 게시물’에서 ‘안녕’의 사진을 발견했다. 바로 며칠 전, 내 자리에 앉아있던 그 커플이 찍은 사진이었다. ‘우리 만남 100일’이란 제목 아래 좋아요 수백 개, 댓글에는 “감성 대박”이란 말이 줄줄이 달려 있었다.
그런데— 화면을 확대하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사진 속 한쪽 구석에, 내가 있었다. 각도와 거리 탓인지, 마치 그 남자(그 날 내 방공호를 탈환한)와 나란히 라테를 마시는 연인처럼 보였다. 심지어 내 손끝이 남자의 머리 뒤쪽에 걸린 듯 보여, 포토샵도 안 했는데 커플 완성. 좋아요 수백 개, 댓글엔 "그 옆 커플도 진짜 잘 어울려요." 커피를 마시다 사레가 들렸다. 부러우면 지는 거지만… 이건 지는 게 아니라, 졸지에 ‘가짜 커플 데뷔’였다.
사진 속에는 라테와 수국, 그리고 모르는 남자와… 이상하게 친밀해 보이는 내가 있었다. 웃음이 났다. 자리도, 계절도, 음악도, 세상도 언제든 나 없이 흘러간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그 커피에, 그 팝송에 집착한다. 익숙함 속에서만 얻을 수 있는 평온이 있다.
그걸 지키고 싶은 마음— 왜냐고?
고독해서 그래.
고독은, 혼자 마시는 커피의 쓴맛 뒤에 숨은 은근한 단맛처럼, 나를 오래 버티게 한다. 내일도, 모레도, 나는 이 자리에서 세상과 적당히 거리를 둔 채, ‘안녕’에 인사를 건넬 것이다.
감성 에세이, 일상, 고독
― EP.6《고독해서 그래》: 《카페와 S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