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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해서 그래/ 라디오와 와이퍼

빨간불, 초록불, 내 마음은 깜빡이

by 이다연
여행길엔 라디오만 한 친구가 없다.
말없이 잘 떠들어 주고,
질리지 않게 음악도 틀어주고,
무엇보다 말대꾸를 안 하니까.


동해의 일출을 보고 싶어 한 밤중, 무작정 바다를 따라 차를 몰았다. 머리엔 강릉 바다가 있었고, 차 안에선 라디오 DJ의 나긋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오늘은 청취자 여러분의 여행 사연받아보고 있는데요.』

운전하며 무심코 듣다가 문득 DJ가 멘트에 귀가 번쩍 뜨였다.

『익명으로 온 사연인데요, 한번 읽어볼게요.
‘DJ님, 저는 혼자 여행하는 걸 좋아합니다. 좋아한다기보단 습관 같아요.
그냥 그렇게 자꾸 어디론가 갑니다.
근데 사실은 저도 이유는 잘 몰라요.’』


잠깐만, 이거… 내 얘기 아니야? 당황해서 볼륨을 더 높였다. 차라리 누가 몰래 내 차에 도청기를 설치했으면 이해가 갈 지경이었다. DJ의 목소리는 나긋나긋 이어졌다.

『사실 외롭기도 하고,
남들은 다 짝꿍을 이뤄 다니는데
혼자만 그러는 게 이상해 보일까 걱정도 돼요.
그런데 막상 혼자 가면,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좋아요. 이상하죠?』

혼자 좋아 죽는다는 그 익명 청취자에게 DJ가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요, 하나도 이상하지 않아요.
저도 그런데요.
혼자 가야 진짜 내 마음을 잘 들을 수 있으니까요.』

그 말을 듣자, 나는 나도 모르게 차를 갓길에 세우고 있었다. 잠시 라디오를 멍하니 쳐다봤다. 순간 울컥했다.

왜 내가 신청하지 않은 사연이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왜 DJ가 나보다 더 내 마음을 잘 아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DJ의 말에 마음이 살짝 울렁였다.


잠시 후 DJ는 사연의 마무리로 음악을 틀었다. 선곡 센스 무엇.
적재의 ‘별 보러 가자’.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결국 세상엔 나 같은 사람이 많다는 거지. 이렇게 아무 데로나 별을 찾아 기는 사람들이.


차창 밖으로 잔잔한 파도가 밀려왔다. 노래가 끝날 때까지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DJ의 멘트가 끝나자 나는 차 안에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신청했었나...?
기억이 안 나네.” ㅋㅋ..

웃으면서 다시 출발했다.
왜 갑자기 울컥했는지, 왜 혼자 떠나는 길이 좋은지 정확히 몰라도 상관없었다. 그냥... 뭐, 별 이유 있나.


*****

오랜만에 모임이 있었다. 오랜만이라고는 하지만, 솔직히 ‘억지로 오래간만에 참여한 자리’였다. 내가 왜 이 회식을 싫어했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아무튼 호기롭게 간다고 대답해 놓고는 내내 후회만 했다. 모임이 끝나자마자 빠져나와 급하게 차를 몰고 집으로 향했다.


하필이면 소나기가 쏟아졌다. 누가 하늘에 양동이를 엎어놓았나 싶을 정도로 심하게.

앞차의 빨간 브레이크등이 줄줄이 멈춰 선 도로 위에서 내 차의 와이퍼만 미친 듯 춤을 추었다.

‘칙-칙, 칙-칙.’

차창 위로 쏟아지는 빗물을 보며 생각했다.

'아, 진짜 왜 간다고 했지?'
후회는 늘 늦게 찾아오고, 그날따라 내 차 앞 신호등도 유난히 늦게 바뀌었다.


빨간불.

“그래, 그만두자 이 모임.
이젠 말할 때 됐어.”

잠깐 한숨을 쉬었다.

초록불.

“아냐,
그래도 조금 더 버텨볼까?”

와이퍼 사이로 신호등을 바라보며 나 혼자 빨강과 초록 사이를 끝없이 오갔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그날 신호등은, 내 마음처럼 도무지 바뀔 생각이 없었다. 한참을 기다리다 지친 나는 결국 웃었다.

“얘, 너 고장 났니?
아니면 지금 나한테 생각할 시간을 주는 거야?”

'빨간불이면 이 모임 그만두는 거고, 초록불이면 계속한다.'


그러자 와이퍼는 더욱 활기차게 움직이며 더 많은 빗물을 지워댔다. 그리고 그 순간, 익숙한 라디오 DJ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여러분, 가끔 인생에 신호등이 필요하죠.
빨간불에 멈추고, 초록불에 출발하고…
그런데 가끔은요,
신호등이 너무 안 바뀌어서 마음이 조급해질 때가 있어요.』

마치 나에게 직접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근데요,
가끔 그렇게 신호가 오래 걸릴 때는 어쩌면…
잠시 멈춰 서서,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생각해 보라는 누군가의 신호일지도 몰라요.』

이 DJ, 내 차에 몰래 타고 있나? 아니면 누가 몰래카메라를 설치한 거 아닌가 싶어 나는 어이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웃는 사이, 드디어 신호등이 바뀌었다.


초록불.

다시 액셀을 밟으며 생각했다.

"그래, 때론 잠깐 멈춰 서는 것도 나쁘지 않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창문 위로 와이퍼는 여전히 춤을 추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마음만큼은 이미 맑게 개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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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우여곡절 끝에 집에 도착하자,

고독한 또 다른 존재—울 집 댕댕이가 품에 뛰어들었다. 녀석을 품에 꼭 안자,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매번 떠나는 이유는,

결국 이 작은 존재에게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일까?

뜬금없이 아름이에게 물었다.

“아름아,
너 내가 왜 자꾸 떠나는지 알아?”

그리고 웃으며 대답했다.

“고독해서 그래.”



감성 에세이, 일상, 고독

― EP.5《고독해서 그래》: 《라디오와 와이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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