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라서 괜찮은, 그 길 위에서
고3 2학기, 세상이 너무 궁금한 시기에 운전을 배웠다. 정확히 말하면, 수능보다 클러치 밟는 법이 더 궁금했던 시절.
"엄마, 나 운전 배우고 싶어!"
하루에도 열두 번 졸라댔더니
- 솔직히 내가 엄마를 졸랐는지, 엄마가 먼저 권유를 했는지는 정확하지는 않다. 기억이란 원래 입맛 따라 포장되기도 하니까.
아마 엄마는 내가 ‘세상을 빨리 만나고 싶어서’ 면허를 따는 줄 아셨을 거다. 뭔가 해방감을 느끼고 싶어서, 혹은 자립의 상징 같은 걸로 여기셨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는,
“비 오는 날, 차 안에서 빗소리 듣고 싶어서”
운전이 하고 싶었다.
차창 위를 따라 미끄러지는 빗방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목소리. 그리고 그 소리에 맞춰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와이퍼의 리듬.
내가 상상한 ‘어른의 낭만’은 바로 그것이었다. 면허 시험장에서 “클러치를 부드럽게 밟아보세요”라는 말도, 사실은 와이퍼 춤의 프롤로그였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주행 연습’을 통해 배우는 건 차선 변경이 아니라, 세상에 조금씩 나를 밀어 넣는 용기였다는 걸.
*****
사람들은 자주 묻는다.
“아니, 그렇게 자꾸 떠나면 안 피곤해?”
그럼 나는,
“아니요, 저는… 호기심이 강해요.
모든 걸 다 확인하고 싶어요. 확인병일까요?”
TV에서 누군가,
“바로 이곳! 국내 여행지 1위, 삼척 장호항입니다~”
그러면 나는 바로 검색창에 “장호항 혼자 가는 법”을 치고 있다.
유튜브에서 누가 “노을이 미쳤어요”라는 제목으로 영상을 올리면, 나는 댓글보다 먼저 날씨 예보부터 확인한다. 그리고 그 노을을 직접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다. 누가 예쁘다 그러면 꼭 가야 하고, 누가 별로라 그러면 더더욱 가서 판단해봐야 하는 성격. 그게 내 ‘역마살’의 정체다.
그렇다. 사람들은 SNS로 여행을 끝내기도 하지만, 나는 한 단계 더 가야 끝이 난다. 발로 확인하고, 눈으로 담고, 사진으로 기록하고, 글로 저장해야 비로소 마무리된다.
어느 해변가 벤치에 앉아 바다를 보다 ,
“그래, 이 느낌은 직접 와서 봐야 알지.
영상으로는 절대 안 나오는 각이야.”
이미 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여정은 때때로 갑작스럽고, 약간은 과몰입이다. 남들은 그냥 스크롤 내리면 끝나는 절차를 나는 열차 시간표와 주차 가능 여부까지 확인한다.
그다음 말과 동시에 행동.
마음에 꽂히는 풍경 하나만 있으면 그쪽으로 움직이는 호기심의 나침반이다. 그리고 도착한 장소에서 슬그머니 사진을 찍고, 천천히 앉아 있다가,
“이건 글로 남겨야겠다.”
마지막엔 늘 같은 말로 결론을 낸다.
*****
어느 날, TV를 보다가 7번 국도를 따라가는 여행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됐다. 그날 아침, 이유 없이 마음이 들뜨고 복잡했다. 그냥… 어디든 떠나고 싶었다. 왜 그런 날 있지 않나? 가만히 있는 것조차 괜히 죄처럼 느껴지는 날.
“그래, 오늘이야.”
별다른 계획도 목적지도 없이, 그렇게 나는 시동을 걸었다.
무작정 가방을 챙기고, 지도 앱을 켜고, 주유를 가득 채웠다. '그래. 7번 국도.
바다를 따라 북쪽으로 가보자.
그리고 7번 국도를 따라 아래로 아래로...'
창문을 열고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생각했다.
“ 이게 바로 진정한 자유지!”
왼쪽엔 철썩이는 파도,
오른쪽엔 ‘망치횟집’ ‘정자바다’라고 쓰여 있는 간판들,
차 안엔 선우정아의 ‘도망가자’가 흐르고 있었다.
브레이크 대신 가속 페달을 밟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했던 그날의 나는, 이미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
울진을 지나며, 내비가 말했다.
“300미터 앞,
좌회전입니다.”
그 방향은… 바다였다.
그것도 그냥, 정직하게 푸른 바다.
“얘, 너… 동해는 처음이니?”
나는 이렇게 말하며 용감하게 내비를 무시하고 직진을 해 버렸다.
그 뒤로, 내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정적.
운전은 외롭고, 내비는 삐지고, 나는 뒷좌석에 던진 과자봉지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너는... 그래도 내 편이지?”
*****
강원도 진입하자 7번 국도의 명물, 시속 42km 군단이 등장했다. 삼삼오오 바다를 보며 달리시는 어르신 부대들. 천천히 뒤를 따라가다 보니 나는 이제 운전이 아니라 고요한 인내의 수련을 하고 있었다.
잠깐 추월하다가 등짝에 식은땀이 흘렀다.
“아니야…
나 아직 명상 덜 했어 참아야 해!…”
그래서 다시 브레이크를 밟았다. 이쯤 되니 바다는 뷰고 뭐고, 그냥 속도위반의 유혹만 존재했다.
*****
삼척 어귀 해안도로에서 신호대기에 멈춘 차창 밖으로 반짝이는 바다 윤슬이 온통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파도도, 갈매기도, 지금 이 순간을 위해 기다렸다는 듯 찰칵찰칵. 나는 내 눈에 보관하려고,
눈이 다 아플 만큼 깜박거렸다.
“캬… 이 맛에 운전하지.”
그때 옆 오토바이 아저씨가 헬멧을 살짝 들어 올리며
“그쵸?
7번 국도는… 그냥 달려야죠.”
그 순간— 내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800미터 앞, 우회전입니다.”
오호~~ 그렇지!
우리는 다시… 화해했다.
*****
우여곡절 끝에, 해가 거의 다 떨어진 시각에 속초에 도착했다. 일몰 타임.
순간 피식 웃음이 났다. 일출의 성지. 장엄한 붉은 태양이 바다 위로 떠오르고, 그걸 보기 위해 새벽 네 시부터 벌떡 일어나는 사람들이 생각이 나서였다. 삼각대, 붕 떠 있는 텐션, 입김 나는 추위 속 셔터 소리. 근데 나는 지금— 일출은커녕, 정확히 반대편 시간에 겨우 도착했다.
그 흔한 새벽 인생샷도 없고, SNS 각도도 없고, 그저 노곤한 해가 저물고 난 뒤의 바다만 있을 뿐. 하지만 그 풍경이 이상하게 더 정겨웠다. 바다는 여전히 파도치고 , 하늘은 따뜻한 주황빛으로 극도의 아름다움을 뿜어냈다. 떠오르는 것도 아름답지만, 지는 것도 나름의 고요가 있구나!
해는 하루에 한 번 뜨고, 하루에 한 번 진다. 누군가는 시작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끝이라 부르지만—그저 돌고 도는 세상에서 다른 위치에 서 있을 뿐.
그러니까 나도 괜찮다.
조금 늦게 도착했을 뿐,
나는 내 시간대로 이 풍경을 만났으니까.
식당에 들어가 고등어 정식을 주문했다.
직원분이 물었다.
“두 분이세요?”
“아뇨. 저랑 내비요.”
나는 멋쩍어 싱거운 농담을 했다.
혼자 떠난 7번 국도 여행에서 나는
바다도 보았고, 사람도 만났고,
무엇보다 ‘혼자서도 재밌는 나’를 만났다.
Add------♡
7번 국도는 그냥 길이 아니었다.
혼자라는 걸 실컷 누려도 된다는,
조용한 허락 같은 길이었다.
어스름한 속초 바닷가.
노을이 물든 어느 저녁,
나는 차 안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해가 지는 바다를 한참 바라보았다.
왜냐고 묻는다면—
"... 고독해서 그래. "♡
감성 에세이, 일상, 고독
―EP.4 《고독해서 그래》: 《7번 국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