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또 깜빡"
추운 어느 겨울,
따뜻한 커피를 내려 머그컵에 담았다.
“이건 오늘 하루의 작은 위로야.”
하며 우아하게 들고 다니다가…
정신을 놓은 순간,
그 귀한 커피는 냉장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시간이 지나 목이 말라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그곳엔 아이스커피로 변신한 내 커피가 서 있었다.
분명 따뜻하게 만나야 할 우리의 운명이,
차가운 모습으로 다시 만나다니.
순간, 피식 웃음이 났다..
식은 건 커피였을까,
아니면 따뜻함을 붙잡지 못한 내 마음이었을까.
“뭐, 겨울엔 따뜻한 커피보다
쿨한 인간이 더 어울리잖아.”
내 머릿속에는 ‘저장하기’ 버튼이 없는 것 같다.
파일은 늘 자동 저장을 꺼놓은 채로 종료되고,
사람과의 약속은 알람을 꺼놓은 채로 시작된다.
그래서 종종 웃지 못할 실수를 한다.
바쁜 출근길이었다.
전화기가 잡히지 않아 한참을 헤매다가 결국 냉장고 속에서 핸드폰을 발견했다. 배터리를 손에 쥐었을 땐 이미 얼음장처럼 식어 있었고, 나는 어이없는 상황에 분개했지만,
“역시… 난 쿨(cool)한 인간이야.”
웃음이라기보단, 체념에 가까운 위로의 혼잣말로 하루를 시작했다.
바쁜 기획서를 쓰던 중 허기가 졌다.
배와 등이 서로 형님, 아우하고 있는데 라면을 끓이다가 수프만 넣고 면을 빼먹었다.
짭짤한 국물 한 숟갈을 뜨며 중얼거리는 나.
“뭐, 이것도 새로운 메뉴지.”
허무했지만, 스스로를 달래는 습관은 나쁘지 않았다.
벨 소리에 분명 문을 열었다.
그리고 택배가 온 줄도 모르고 현관 앞 상자 위에 앉아 책을 읽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상하게 의자가 딱딱하다 싶었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내가 앉은 건 배송된 고구마 상자였다. 그날 저녁은 선택의 여지없이 고구마 파티였다. 나는 이 많은 고구마를 어디에 쓰려고 배송시켰을까? 책도, 상자도, 결국 다 소화시켰다.
며칠째 깜 박을 반복하다가 드디어 아침에 치약을 분해해야 했다. 그리고 직행한 마트에서는 치약을 사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세일하는 김치와 맥주, 그리고 의미 없는 과자 봉지만 들고 나왔다.
치약은? 안녕.
ㅡ결국 다시 이 닦으러 편의점.
사람들은 내게
"요즘 건망증이 심하네?"
라고 말한다.
그러면, 나는
“건망증이 아니라 뇌의 자동 정리 기능이에요.
불필요한 건 과감히 비워내는 거죠.”
하지만 사실은 안다. 그 자동 정리 기능은 꼭 필요한 것들마저 무심하게 버리고 간다는 걸.
그래서일까. 나는 버리는 걸 좋아한다.
새로운 게 하나 들어오면,
반드시 하나는 내보내려 애쓴다.
옷을 한 벌 사면 낡은 셔츠를 버리고,
노트를 새로 사면 다 쓴 노트를 정리한다.
그런데 가끔은 헷갈려서 새 옷을 버리고 낡은 티셔츠를 남기기도 하지만...
덕분에 내 옷장은 여전히 2005년 패션에 충실하다.
어쩌면 내 삶도 거기 멈춰 있는 건 아닐까?
***×***
어느 날은 꿈에서 유명한 소설가가 되었다.
수많은 청중 앞에서 낭독하는 내 소설은, 완벽했다.
리듬도, 문장도, 주제도 모든 게 빛났고,
나는 그 속에서 찬란히 빛났다.
청중은 숨죽이고 듣다가,
마지막 구절에서 터져 나오는 기립 박수를 쏟아냈다.
나는 그 박수 소리에 눈을 떴다.
현실의 침대, 현실의 알람.
“아… 방금 그 문장…
뭐였더라?”
머릿속을 아무리 뒤져도,
소설의 단 한 줄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펜을 잡고 흰 종이 위를 노려봤다.
내가 써야 할 문장은 방금 전까지 분명히 내 안에 있었는데, 이제는 빈 공간만 남아 있었다. 마치 꿈이 나를 놀리듯,
“명작은 이곳(꿈)에 두고 가라”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날 하루 종일 나는 멍하니 커피만 리필했다.
결국 내 노트에 남은 건, 이렇게나 짧은 한 줄 뿐이었다.
“명작을 썼는데, 기억이 안 난다.”
어제는 약속 시간을, 오늘은 장 본 치약을,
그리고 가끔은 소중한 사람의 이름까지도 버린다.
미안하다. 뇌의 정리 기능이 너무 과감하다.
그래도 나는 위로한다.
“이건 건망증이 아니라,
삶의 미니멀리즘이다.
공간도, 기억도
가볍게 비워야 새로운 게 들어오니까.”
나는 오늘도 무언가를 잊는다.
컵을 냉장고에 두고 잊은 대신 차가운 물을 얻었고,
치약을 잊은 대신 맥주와 김치를 얻었다.
고구마 상자에 앉은 덕분에 저녁 반찬도 해결됐다.
그리고, 명작을 잊은 대신…
또 다른 하루의 웃음을 얻었다.
삶은 늘 거래 같고, 손해 같지만,
묘하게도 그 빈자리에 웃음이 들어찼다.
아마 내일도 또 잊을 것이다.
잊고, 비우고,
그 자리에 낯선 것을 채워 넣으며 나는 다시 웃을 것이다.
왜냐고?
고독해서 그래.
나는 매일 잊으며 살아간다.
이름은 기억하고 싶다.
왜냐면, 불러주는 누군가가 있으니까.
감성 에세이, 일상, 고독
― EP.8《고독해서 그래》: 《고독은 건망증을 닮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