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고독을 배달하다.
나는 원래 ‘대단한 꿈’ 같은 건 잘 꾸지 않는다.
왜냐면?
그런 꿈은 잘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브런치에 글을 올리다 보니, 슬쩍 욕심이 생긴다.
‘나도 언젠가
브런치북 공모전에 붙을 수 있을까?’
‘만약 출간 제안이 오면,
인터뷰에서 뭐라고 대답하지?’
‘혹시, 사인회에서 내 이름이 생각 안 나면?’
이 모든 염려가 우습지만, 사실이다.
나는 늘 깜빡깜빡하는 사람이니까.
브런치에 글을 쓰는 건, 마치 내 고독을 포장해 택배로 보내는 일 같다.
그리고 댓글 하나하나가 도착하면, '내 우편물 송장이 무사히 배달되었구나', 확인하는 셈이 된다.
“작가님, 덕분에 위로받았어요.”
그 한 줄이 내 손에 도착하는 순간,
글쓰기는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 누군가와 연결되는 일이 된다.
내가 브런치를 통해 이루고 싶은 꿈은 소박하고 단순하다.
그저 누군가의 하루에 웃음을 한 모금,
위로를 반 모금, 공감 한 잔 정도의 갈증을 채워주고 싶은 것.
어느 날, 에세이에 이런 댓글이 달렸다.
“작가님 글 덕분에
퇴근길 지하철에서 혼자 피식 웃었어요.
남자친구가 실없이 왜 웃냐고 묻길래
그냥 음악 듣는다고 했답니다.”
그 순간 알았다.
글은 이렇게, 누군가의 하루를 환하게 밝혀주는 작은 버튼이 될 수도 있음을...
또 다른 날에는 이런 메시지가 왔다.
“며칠째 잠을 못 잤는데,
작가님 글을 읽으니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어요.
오늘은 편안히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때 깨달았다.
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누군가의 수면제 없는 수면유도제가 될 수도 있다는 걸.
그리고 가끔은 이런 반응도 온다.
“작가님,
저도 그런 적 있어요.
진짜 제 얘기인 줄 알았다니까요.”
그럴 때면,
내 고독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듯한 공감 유도 가능하다는 걸 느낀다.
오질 없이 가끔은 황당한 공상에 웃음을 얹는다.
만약 공모전에 당선돼 출간 제안까지 이어진다면,
인터뷰를 하게 되겠지?
기자가 묻는다.
“작가님, 어떻게 이런 글을 쓰시게 되었나요?”
나는 멋지게 대답할 거다.
“고독해서, 그래요.”
그 짧은 대답 하나로 기사 제목으로 뽑힌다.
「고독의 미학, ○○ 작가 인터뷰」
기자가 눈을 반짝이며 메모하는 순간,
나도 잠시 진짜 작가가 될것이다.
그리고 대망의 사인회.
긴 줄 끝에 독자가 책을 내밀며 말한다.
“작가님,
여기에 이름 써주세요!”
그런데— 정작 내가 내 이름을 까먹는다.
(깜빡이가 내 별명이다.)
펜 끝에서 맴돌다 결국 적은 건,
‘… 고독해서 그래’.
사인회 역사상 최초로,
작가 사인이 책 제목이 된 순간이 될 것이다.
(나중에 헌책방에서 프리미엄 붙어 거래될지도 모른다. “원본은 작가 이름이 아니라 명대사였다!” ㅋ)
나는 사실 이 글을,
「작가와 함께 만드는 브런치 10주년 팝업 전시」 프로젝트를 보고 쓰게 되었다.
‘브런치를 통해 나는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스스로에게 묻다가,
내 답이 거창하지도 번듯하지도 않음을 깨달았다.
*
내가 브런치로 대박 작가가 될 확률은?,
우습게도 내가 내 이름을 잊지 않을 확률과 비슷하다.
그저 내 글이,
누군가의 냉장고 속에서 우연히 발견된 차가운 커피 같기를 바란다.
원래는 따뜻하려 했지만,
어쩌다 식어버린 그 아이러니 속에서 오히려 더 신선한 위로가 되기를...
브런작가가 되어 글을 쓰기 시작한 날로부터,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썼다.
오늘 이 글은, 125번째 기록.
곧, 내가 글을 쓴 지 125일째 되는 날의 흔적이다.
숫자로만 보면 작은 발자국 같지만,
내게는 고독을 이겨내며 쌓아 올린
나만의 기념비다.
그래서 다시 스스로에게 묻는다.
“브런치를 통해
나는 어떤 꿈을 꾸는가?”
아마 답은 늘 같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웃음을 한 모금,
위로를 반 모금,
그리고 공감 한 잔을 건네는 것.
그 작은 마음이 모여,
오늘도 나는 또 글을 쓴다.
고독해서,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쓴다.
P.S.)
그리고, 혹시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있다면
—내 꿈은 이미 조금은 이루어진 셈이에요.
(읽어줘서 고마워요. 진심으로!)”
감성 에세이, 일상, 고독
― EP.9《고독해서 그래》: 《브런치에서 꾸는 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