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와 하루에 붙여놓는 작은 포스트잇
나는 잠이 없다.
밤이 길어도, 낮이 길어도,
내 안의 시계는 늘 깨어 있다.
그렇다고 피곤하지 않은 건 아니다.
피곤을 무시하는 능력, 그것이 내 특기다.
특허라도 내야 할 만큼.
커피는 나에게 기상 알람이 아니다.
그저 내 안의 호기심을 태우는 연료,
나를 움직이게 하는 작은 핑계다.
나는 커피를 가리지 않는다.
싱글 오리진의 투명한 산미도, 블렌딩의 무게감도, 라이트 로스트의 가벼운 노트도, 다크 로스트의 쓴 여운도.
샷을 더해 무거워진 아메리카노는 마치 시간을 덤으로 번 느낌이다.
싱글 오리진? 언제든.
“이건 과테말라 안티구아의 은은한 산미예요.” 하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산미가 뭐였더라…?’
하고 있다.
다크 로스트? 당연히.
“탄맛이 강하죠.”
하면,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응, 마치 내 인생의 뒷맛처럼.”
샷 추가 아메리카노는 시간을 덤으로 주는 마법 같고, 에스프레소는 내 고독을 30ml 잔에 압축해 놓는다.
커피는 하루를 늘려준다.
짧디 짧은 시간 위에 덧붙여진 작은 연장선.
나는 그 위에서 또 다른 일을 벌이고,
또 다른 문장을 쓴다.
커피는 고독을 다른 빛깔로 번역한다.
혼자 마시면 깊어지고, 누군가와 마시면 풀어진다.
고독조차 커피 앞에서는 모양을 바꾼다.
왜 나는 커피를 사랑할 수밖에 없을까?
첫째, 커피는 내 호기심과 닮았다.
콩마다, 원산지마다, 로스팅마다,
물 온도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세상 모든 카페가 도서관이고,
매 잔이 책 한 권처럼 펼쳐진다.
더군다나 바리스타 손길마다 또 다른 맛이 난다.
세상 모든 카페는 작은 실험실이고,
한 잔 한 잔은 과학 보고서 같다. (결론은 늘 “맛있다.”)
둘째, 커피는 내 하루를 억지로 늘려준다.
사실 내 하루는 턱없이 짧다.
하고 싶은 건 많고, 써야 할 건 더 많다.
커피는 그 부족한 하루에 덤으로 붙여놓는
포스트잇 같은 존재다.
“시간 없음 → 커피 있음 → 괜찮음(같은).”
셋째, 커피는 고독을 변주한다.
혼자 앉아 마시는 블랙은 내 고독을 깊게 내리고,
친구와 나누는 라떼는 수다의 불꽃이 된다.
낯선 바리스타의 설명을 들으며 마시는
싱글 오리진은 내 고독에 작은 균열을 낸다.
결국 같은 원두도, 마시는 순간마다
새로운 캐릭터 DLC처럼 다가온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내가 고독한 건 카페인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해야 할 일, 보고 싶은 것, 쓰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다.
짧은 하루가 모자라서, 나는 커피를 찾는다.
여름은 여전히 뜨겁고, 나는 여전히 고독하다.
그리고 커피는, 그 모든 것을 삼켜내듯
쓴맛 속에서 나를 지탱한다.
결국 커피는 나에게
고독을 견디게 하는 변명이자,
짧은 하루를 늘려주는 착시이며,
끝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습관이다.
여름 햇살이 창문으로 들어오면,
또 한 모금, 에스프레소를 찾는다.
“고독해서 그래. 아니,
나는 짧은 하루를
더 살아내고 싶어서 그래.”
어느새 바람이 달라졌다.
여름의 열기가 서서히 식고,
가을이 문 앞에 서 있다.
길가에 피어난 코스모스가 흔들리며
계절의 전령처럼 속삭인다.
아이스커피의 시원함보다,
손끝에 스며드는 따뜻한 커피의 온기가
더 그리워진다.
커피 향 사이로 스쳐 가는 코스모스의 빛깔은
마치 고독을 달래는 가을의 손수건 같다.
나는 그 앞에서 잠시 멈춰 서서,
내 하루를 조금 더 길게 붙잡는다.
감성 에세이, 일상, 고독
― EP.10《고독해서 그래》: 《여름, 고독, 그리고 카페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