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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해서 그래/ 나는 VIP

고독을 즐기는 작은 등급표

by 이다연



VIP-

혼자의 시간을 귀하게 대접하는 법


세상에, 나만큼 VIP 대접을 받는 사람도 드물다.

카페 VIP, 도서관 VIP, 배달앱 VIP, 스트리밍 VIP, 주유소 VIP.

뭐든 다 VIP다.


사실 한 우물을 판다기보다는 그냥 귀찮아서다.

바꾸는 게 더 복잡하니까 그대로 둔다.

묘한 건, 나는 변화를 좋아하는 사람 같으면서도

또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주중엔 바쁘게 일만 하며 보낸다.
사람 만나고, 마감에 치이고,
쳇바퀴처럼 구르는 일꾼의 삶.


그러다 주말이 오면 불쑥 다른 얼굴을 꺼내 든다.
밖으로 떠도는 역마살이 있으면서도,
또 집에 콕 박혀 있고 싶어 하는,
그야말로 양면 인간의 하루다.


‘주말 아침, 커피 향이 번지는 순간.

오늘 하루를 어떻게 시작하시겠습니까?

작은 습관 속에서도, 당신은 이미 VIP입니다.’


아침엔 에스프레소, 저녁엔 뜨아.
이젠 주문하지 않아도 음료가 준비된다.

“VIP 고객님,
오늘도 아이스로?”

라는 말에 괜히 어깨가 으쓱해진다.


하지만 사실은 뜨아파다.
겉으론 시크하게 아아를 들이켜도,
속은 늘 뜨거운 김을 그리워한다.
변화를 즐기는 듯 보이지만
커피 취향만큼은 꾸준히 ‘뜨거운 쪽’이다.


결국 내 하루도 뜨아처럼,
서서히 식어가는 온기로 버틴다.


‘낮의 정적 속, 책장 넘기는 소리.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커피 향이 채 가시기도 전에 도서관에 간다.
내가 앉던 자리는 늘 내 몫처럼 남아 있다.
자리 지킴이 아저씨가

“오늘은 늦으셨네요”

라며 인사할 정도.


책을 읽는 건지, 의자를 지키는 건지 헷갈리지만,
어쨌든 그곳에서만큼은 ‘지식의 VIP’였다.


쌓아둔 책은 언젠가 읽히지 않아도,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로가 된다.^^


‘저녁이 다가오면, 혼자 먹는 밥상도 충분히 특별할 수 있습니다.

그때 당신은 혼밥 VIP.’


집에 돌아와 샐러드를 씻다가도

결국 손가락은 배달앱을 향한다.
치킨, 족발, 국밥. VIP 쿠폰이 있으면 괜히 눌러본다.


그렇게 나는 ‘맛집 탐방가’가 아니라
‘배달앱 충성 고객’으로 승급했다.


때로는 손가락 한 번의 클릭이,
쓸쓸한 마음을 달래주는 가장 빠른 방법이 된다.


‘불 꺼진 방 안, 화면 불빛에 잠긴 밤.

끝없이 이어지는 재생 버튼처럼,

하루도 멈추지 못한 채 흘러갑니다.’


넷플릭스, 웨이브, 티빙, 왓챠.
이제는 뭘 본 건지, 어디까지 본 건지 가물가물하다.
확실한 건 결제일마다 빠져나가는 카드값뿐.


남는 건 ‘시청 기록’.
마치 자동 재생 버튼이 눌린 듯,
나도 화면 속 장면처럼 흘러가고만 있다.


‘새벽의 길 위에서, 엔진 소리와 함께 자유를 느끼는 순간.

그대는 분명히 길 위의 VIP입니다.’


차를 끌고 새벽 고속도로를 달리다
주유소에 멈춰 선다.

포인트 적립은 차곡차곡 쌓이고,

커피 한 잔을 손에 든 채 세상을 바라본다.


그 순간만큼은 정말 자유로운 영혼 같다.

‘길 위의 VIP’라는 착각이,

왠지 꽤 근사하게 느껴진다.


꽉 찬 기름통을 보며 알게 된다.
자유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지금 달려갈 수 있는 힘에 있다는 걸.


이렇게 주말 하루가 흘러간다.

나는 변화를 좋아하는 듯하면서도

결국 늘 같은 곳에 머문다.

VIP 등급은 변하지 않고, 취향도 거기서 거기다.


밖에선 광고 멘트에 흔들리고,
집에선 댕댕이 꼬리에 마음이 풀린다.

그리고 깨닫는다.


나를 VIP로 만드는 건 포인트도, 등급도 아니다.
혼자일 때조차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는 순간들이다.


사람은 누구나 결국 혼자다.
외로움은 피할 수 없는 조건이고,
고독은 그 조건을 견디게 하는 힘이다.


그래서 혼자여도 괜찮다.
아니, 혼자이기에 더 빛나는 순간이 있다.


그때 나는 안다.
고독은 결핍이 아니라,
나를 나답게 만드는 가장 깊은 자리라는 것을.


이렇게 살아가는 이유를 묻는다면
나는 웃으며 대답할 것이다.


“고독해서 그래.
그 고독이 나를,
오늘도 VIP로 만든다.”





P.S.

‘청취자 여러분,
오늘도 당신은 충분히 VIP입니다.’


라디오를 끄고 나서야 알았다.
그 목소리는 DJ의 것이 아니라,
어쩌면 내 마음이 스스로에게 건네던 위로였다는 것을.


감성 에세이, 일상, 고독
EP.12 《고독해서 그래》: 《나는 V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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