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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해서 그래/ 나의 프라임 타임

“고독을 말리는 시간”

by 이다연




고독을 헹구는 법


추분이 지나면서 밤이 길어졌다.

낮의 햇살은 여전히 따스하지만,

해가 지면 공기는 서늘하다.


새벽 두 시.
도시는 잠들었지만,

내 뇌는 야간 근무 중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꿈나라 VIP석에 앉아 있을 시각,
나는 혼자 조용히 ‘야간 자아 회의’를 연다.


창밖 가로등은 괜히 더 밝아 보이고,
벽시계 초침은 나만 괴롭히려는 듯 크게 들린다.
낮에는 묻혀 있던 소리들—냉장고의 웅웅 거림,
바람에 삐걱이는 창틀—까지 합세해

“잠은 사치지,
생각이나 더 해라”

하고 속삭이는 것 같다.


누군가는 이 시간을 불면이라 부르겠지만,
나는 ‘자기 성찰의 프라임 타임’이라 부른다.


낮에 미뤄둔 고민들이 줄줄이 호출되고,
엉킨 감정들이 전선처럼 뒤엉켜 나타난다.
문제는, 그 전선을 풀려다 보면
답 없는 질문이 꼬리를 물고,
불안이 종종 심장을 북 치듯 두드린다는 점이다.


그럴 때 나는 아주 엉뚱한 방법으로 그 불안을 밀어낸다.


바로… 빨래다.


세탁기는 내게 일종의 명상 기계다.

옷감을 넣고 버튼을 누르면
드르륵, 드르륵—
그 일정한 소리가 마음속 소음을 덮어주며

기분이 묘하게 가벼워진다.


어제 점심, 라면 한 그릇을 호기롭게 들이켜다
국물의 불시착을 허용했다.
그 주황빛 얼룩은 오후 내내 나를 따라다니며

“오늘 밤 세탁기 예약이네?”

하고 속삭였다.


결국 밤이 되자 결국 세탁기를 돌렸다.
드르륵, 드르륵—
그 소리에 맞춰 내 마음의 맥박도 차분히 정돈된다.

“그래, 국물 하나쯤은
나를 깨끗하게 만들 핑계일 뿐이야.”


빨래가 돌아가는 걸 보다가 괜히 상상한다.
떨어진 단추도 세탁 한 바퀴 돌리면
다시 제자리에 달려 있을 것만 같다.
옷만이 아니라 하루의 균열까지
함께 봉합될 것 같아, 혼자 웃음이 난다.


그런데 문제는 빨래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
걸레를 들고 바닥을 닦고, 책장 먼지를 털고, 싱크대를 정리한다.


마지막엔 창문까지 닦는다.
빨래는 대청소로 번지고, 대청소가 끝날 즈음엔 동이 터온다.


청소가 끝나면 어김없이 기다리는 손님이 있다.
잠에서 슬금슬금 깨어나는 울 댕댕이, 아름이다.


아름이는 애기 때부터 목욕을 물놀이로 착각했다.
욕실만 열리면 꼬리를 부스터처럼 흔들며 달려와

“나도 깨끗해지고 싶어!”

라는 표정으로 욕조에 뛰어든다.


거품을 풀풀 내며 씻기다 보면
빨래와 청소로 비워진 새벽이 한층 더 환해진다.


세탁기에서 흘러나온 섬유유연제 향기와 아름이의 거품목욕에서 퍼져 나오는 비누향이 뒤섞여 새벽 공기 전체가 ‘프레시 에디션’으로 업데이트된다.


그 향기는 마치

“자, 오늘도 곧 출근이야”

하고 재촉하면서도,

“그래도 아직은
VIP처럼 여유 부려도 돼”

하고 달래는 것 같다.


아름이의 젖은 털에서 거품이 흘러내릴 때,
내 마음의 피로도 함께 씻겨 내려간다.
소파에 드러누운 아름이는

“나는 거품을 즐길테니,
너는 스트레스를 씻어내렴”

하는 듯 보송보송 숨을 고른다.


나는 미소를 짓는다.
내일도 또 목욕 예약은 꽉 차 있을 테니까.


누군가는 묻는다.

“그 시간에 빨래, 청소,
강아지 목욕까지 해서
정말 스트레스가 풀려?”

나는 단언할 수 있다.
풀린다.

아주 확실하게.


새벽 두 시의 빨래와 청소,
그리고 아침 무렵의 아름이 목욕까지—
그것이 내게 주어진 가장 완벽한 ‘셀프 힐링 패키지’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해소법은 있다.

어떤 이는 운동으로, 어떤 이는 술 한 잔으로,

또 어떤 이는 수다로 푼다.


나에겐 그것이 새벽 두 시의 빨래다.

라면 국물 얼룩 하나가 하루를 흔들어도,
세탁기와 대청소,

그리고 아름이의 거품목욕으로 이어진 새벽은
늘 나를 새 옷처럼 가볍게 만든다.


고독 속에서도 살아 있다는 감각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다시 내일을 버틸 힘을 얻는다.

그리고 깨닫는다.


“나는 고독해서 그래.
아니, 내일도 또
목욕 예약이 있어서 더 그래.”


ADD...

“스트레스 해소법이 꼭 거창할 필요는 없죠.
어떤 날은 빨래가, 어떤 날은 라면 얼룩이, 또 어떤 날은 강아지가 제 심리상담사입니다.

스트레스는 쌓아두면 독이 되지만, 이렇게 작은 일상으로 흘려보내면 약이 되기도 합니다.

결국 중요한 건, 고단한 마음을 쌓아두지 않고 내 방식대로 가볍게 털어내는 것.
그 작은 해소들이 모여 내일을 버틸 힘이 됩니다.”



감성 에세이, 일상, 고독
EP.13《고독해서 그래》: 《나의 프라임 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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