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갈 곳이 있다는 단순한 행복”
지난해 추석 전날 저녁,
나는 고속도로 위에 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고속도로’라기보다 ‘주차장’에 가까웠다.
전광판은 붉게 빛나며 이렇게 외쳤다.
“정체 구간 32km.”
차 안 라디오에선 DJ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은 한가위 대보름!
가족과 함께
풍성한 연휴 보내시길 바랍니다~”
나는 괜히 투덜댔다.
“풍성은 무슨…
벌써 과자도 다 떨어졌는데.”
조수석엔 반쯤 비어버린 물병,
뒷좌석엔 쓰러진 김밥봉지.
아까까진 내비랑 대화를 하다가,
이제는 과자봉지랑 눈을 마주친다.
“이제 빈 껍데기지?
나랑 비슷하네.”
창밖을 보니 반대편 차선은 기가 막히게 뚫렸다. 끝없이 이어진 헤드라이트 줄이 활주로처럼 빛났다.
머릿속은 이미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래,
저쪽으로 가면 인천공항?”
상상은 한순간에 폭주했다.
출국장 카운터에 줄을 서서 직원에게 말했다.
“목적지는요…
아무 데나요.”
그리고 몇 시간 뒤—
나는 방콕의 야시장 골목에서 꼬치구이를 뜯는다. 손에는 망고 스무디, 입에 걸린 귀엔 태국 음악.
옆자리 여행자가 묻는다.
“추석?
그게 뭐예요?”
나는 괜히 뿌듯하게 대답한다.
“아,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명절인데요…
지금은
전 대신 똠얌꿍 먹는 중이죠.”
아, 완벽하다.
차 막힘도, 친척 잔소리도 없는 세상.
온전히 나만의 자유.
…그러나, 현실은
어김없이 벨소리로 돌아왔다.
휴대폰 화면에 뜬 두 글자.
“울 맘”
받자마자 들려온 목소리
“지금 어디야?
일찍 와서 송편 빚어야지.”
상상 속 나는 능청스럽게 말한다.
“엄마,
사실 지금 공항 가는 길이에요.
태국이요.”
짧은 정적 뒤, 단호한 대답.
“거기 가서도 송편 빚을래?”
뚝.
(엄마는 늘 내 상상을 3초 만에 종결시킨다.)
나는 웃음이 터졌다.
역시 해외여행보다 강력한 건 송편 반죽 위의 깨 냄새였다.
창문 너머 옆 차를 보니, 뒷좌석에 꼬마가 붙여둔 스티커가 반반였다.
“달 토끼” 그림.
애는 졸려서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옆자리 엄마는 귤을 까서 입에 넣어주고 있었다.
순간, 그 장면이 내 상상 속 어떤 야시장보다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라디오에선 청취자 사연이 흘러나왔다.
“시댁 가기 싫어요.
저도 해외로 도망가고 싶네요.”
DJ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다녀오세요.
거기 가야 또 할 얘기 생기는 거니까요.”
그 말이 훅—
내 마음에도 스며들었다.
그래, 막히는 길도, 귀찮은 인사도,
결국은 다 내가 돌아갈 자리였다.
주유소에 들르니, 줄 선 차들 트렁크마다 참기름 섞인 명절 냄새가 솔솔 흘러나왔다. 각자의 집으로 향하는 냄새. 그 길 위에 나도 서 있었다.
다시 도로에 오르니, 어느새 둥근달이 천천히 떠올랐다. 해도 완전히 지기 전인데, 달은 서둘러 고개를 내밀었다.
“그래…
막혀도 괜찮아.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이미 축복이니까.”
긴 도로 위, 차 안에는 나 혼자였지만 그 길 끝에는 언제나 가족이 기다리고 있었다.
혼자여서 더 선명해진 진실.
긴 길마저 감당할 수 있는 이유.
가족이었다.
고독해서 그래.
귀성길은 늘 막히고 고단하지만,
그 끝엔 우리가 돌아갈 자리가 있습니다.
잠깐의 조급함보다 여유를,
그리고 무엇보다
안전운전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풍성한 한가위 보내세요.
감성 에세이, 일상, 고독
― EP.14《고독해서 그래》: 《반대편 차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