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면, 나는 쓴다.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비는 불편함이고,
널어둔 빨래를 절망으로 바꾸는 재앙이지만,
나에게 비는 세상이 잠시 쉼표를 찍는 시간이다.
빗방울이 떨어지면
세상의 속도가 조금 느려지고,
모든 소리가 부드러워진다.
그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나를 다시 듣는다.
비를 좋아하게 된 건
아마 초등학교 5학년 때였을 것이다.
국어 시간에 황순원의 〈소나기〉를 읽고,
나는 알 수 없는 낭만에 사로잡혔다.
비 오는 날 운동장으로 나가
커다란 느티나무 밑에 대자로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빗방울이 얼굴에 톡톡 떨어졌고,
나는 그게 마치 슬픈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이러다 열이 오르면, 나도 비련의 주인공이 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지만—
현실은.
비련 대신 감기.
비극 대신 콧물.
그리고 ‘이게 뭐 하는 짓이냐!’ 하며 달려온 선생님.
결국 나는 보건실 수건 뒤집어쓰고 약 먹는 ‘현실 5학년 4차원 문학소녀’로 복귀했다.
그래도 이상하게 그날 이후로
비가 오면 그때의 흙냄새와 웃음이 함께 떠오른다.
그래서일까, 나는 아직도 비가 좋다.
비는 언제나 조용한 추억의 코미디를 불러오니까.
그로부터 몇 해 뒤,
나는 에밀리브론테『폭풍의 언덕』을 읽고 또다시 비에 홀렸다.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광풍 같은 사랑을 읽으며 ‘비 맞으며 언덕에 서야 진짜 어른이지’ 하는 이상한 낭만이 피어올랐다.
마침 수학여행이 경주였다.
비 오는 날, 나는 친구들이 숙소에서 컵라면을 먹을 때 혼자 능에 올랐다.
비옷 하나 걸치고, 말 한 마리를 따라 걸었다.
“히스클리프...!”
속삭이려는 찰나,
그 말이 갑자기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생각보다... 컸다.
나는 문학적 감정 대신 본능적으로 외쳤다.
“야! 진짜 오지 마!”
빗속을 달려 내려오는 내 모습은
낭만이 아니라 거의 재난 다큐였다.
그날 이후 나는 알았다.
‘폭풍의 언덕’은 책으로만 오르는 게 낫다는 것을.
그리고 ‘문학적 체험’은 젖지 않는 방 안에서 하는 게 가장 안전하다는 것도.
그래도 이상하게—
비가 내릴 때마다 그날의 흙냄새와 말 울음소리가 떠오른다.
그래서일까, 나는 아직도 비가 좋다.
비는 언제나 조용한 웃음이 깃든 추억의 리플레이니까.
몇 년 뒤, 대학 MT로 제주도를 찾았다.
이번엔 비를 맞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비가 또 나를 찾아왔다.
우리는 카페리호를 타고 떠났다.
출항과 동시에 아줌마 부대의 트롯 댄스가 시작됐고, 배는 마치 노래방 겸 디스코 선박이 되었다.
나는 창가에 서서 바다에 시선을 고정했다.
하지만 시작부터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출항 직후부터 배 안은 이미 한 편의 트롯 버라이어티 쇼였다.
어디서 틀어놓은 건지도 모를 트롯 반주에
아줌마 부대들이 관광버스 춤을 추며
배의 롤링과 함께 좌우로 춤을 췄다.
나는 그 사이에서 괜히 창가에 서서
“나는야 타이타닉의 로즈…”
를 연상하며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역시 그 낭만은 오래가지 않았다.
밤새 내린 비와 거친 파도에
배는 마치 세상 모든 고독을 흔들어내듯 요동쳤다.
결국 ‘로즈’는커녕,
나는 구명조끼도 못 입고 침대에 누운 잭 신세가 되었다.
선착장에 도착하자마자
나의 로맨스는 응급실로 직행했다.
멀미로 쓰러진 나는 엠뷸런스에 실려 제주 땅을 밟았고,
그 순간 깨달았다.
“낭만은 늘, 현실보다 멀리 있다.”
이상하게 비가 오면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비가 좋다.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
커피잔에 닿는 빗방울의 그림자,
그 모든 게 나에게는 고요한 위로다.
비가 오면 세상이 조금 느려지고,
그 느림 속에서 나는 살아 있다는 걸 느낀다.
그리고,
그 느림 속에서 문장을 떠올린다.
비가 내릴 때면 마음의 문이 열리고,
그 틈으로 오래된 기억들이 스며든다.
그 기억들이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되고,
결국 한 편의 이야기가 된다.
어쩌면 나는 고독해서 글을 쓰는지도 모른다.
아니, 비가 와서—
그 고독이 더 잘 들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고독해서 그래.
아니, 비가 와서 더 그래.”
감성 에세이, 일상, 고독
― EP.16《고독해서 그래》: 《고독은 빗소리처럼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