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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thing special/ 보길도,

16. 보길도(甫吉島)

by 이다연



“섬인데도 정원이고,

길인데도 시(詩)다.”

누군가는 남해를 건너고,
누군가는 그 남해에 발자국을 남긴다.
보길도는 그런 섬이다.


"시인의 섬."
"남해의 정원."
"섬이 품은 한 권의 시집."
여기서는 걷는 일이 곧 시를 읽는 일이다.


1. 붓 대신 바람, 보길도의 시작

전남 완도항에서 배를 타고 40분 남짓.
바다 위에 점점이 박힌 섬들을 지나
유유히 도착하는 곳, 보길도.


보길(甫吉)은 ‘복을 태운다’는 뜻,
섬에 내리는 햇살과 바람조차
어딘가 따뜻하고 온화하다.


이곳엔 붉은 벽화 대신,
초록 정원과 흰 파도가 마음을 채운다.
역사의 시가 바람을 따라 흘러
섬의 구석구석에 머무르고 있다.


이 섬에선 풍경조차 시어가 되고

고요한 정원조차 노래가 된다.


2. 다섯 개의 시선, 다섯 개의 풍경


✅ 윤선도 원림(보길도 세연정)

조선의 시인 윤선도가 귀양 와 머물렀던 곳.

자연을 닮은 정원, 물결 위에 앉은 정자는

한 편의 시보다 더 깊은 고요를 품고 있다.

바람은 대숲을 흔들며 그 시절의 운율을 다시 불러온다.


✅ 동천석실

윤선도가 <어부사시사>를 읊던 자리.

“강호에 겨울 되어 눈서리 치는 날에…”

사시사철 어부의 삶을 노래한 시는

보길도의 바다와 함께 지금도 살아 있다.

돌벽에 남은 글씨를 따라가다 보면

시와 바다가 한 몸이 된다.


✅ 예송리 해송 숲


천연기념물 소나무 숲.

그리고 자생초.

곧게 뻗은 나무들은 파도를 막아내고,

섬의 심장을 지켜주는 푸른 기둥 같다.

숲길을 걷다 보면 바람마저 시구처럼 흘러든다.


낙서제와 곡수당

-낙서제와 곡수당, 시인의 정원에서 머무르다.


보길도의 부용동 원림에는 두 곳의 특별한 집이 있다.
하나는 고독 속에서 책을 읽던 서재이고,
다른 하나는 물길 따라 술잔을 띄우며 벗들과 시를 읊던 집이다.


낙서제(樂書齋), 책과 벗한 은자의 서재

낙서제라는 이름은 “책을 즐기는 집”이라는 뜻을 지닌다.
윤선도는 귀양과 은거의 세월 속에서도 글을 놓지 않았다.
그에게 독서와 시는 단순한 학문이 아니라,
세속을 잠시 내려놓고 마음을 씻어내는 은신처였다.


낙서제에 앉으면 창 너머로 연못이 있고,
그 너머로 소나무 숲과 산의 능선이 차분히 펼쳐진다.
책장을 펼치는 순간, 자연과의 대화가 곧 독서가 된다.
책을 읽는 일이 곧 바람과 물, 숲과 하나 되는 시간이 되는 것이다.


곡수당(曲水堂), 물길 따라 흐르는 시심(詩心)

곡수당은 이름부터 풍류를 머금고 있다.
굽이굽이 흐르는 물길, 그 물 위로 술잔을 띄우고
시를 읊던 옛 풍습 ‘곡수연’을 떠올리게 한다.

이곳에서 윤선도는 제자들과 벗들을 불러 모았다.

작은 계류 옆 석축에 둘러앉아,
술잔이 물결 따라 흐르면 그 앞에서 시를 지었다.
단순한 유희가 아니라, 자연의 품에서 문학적 영감을 얻고
벗들과 마음을 나누던 예술적 정원의 정수였다.


두 집이 남긴 의미

낙서제는 고독한 독서와 성찰의 자리였다.
곡수당은 함께하는 시와 풍류의 자리였다.


윤선도의 삶은 이 두 공간처럼,
홀로의 고요와 함께의 즐거움 사이를 오가며 깊어졌다.
은자의 사유와 풍류의 교류가 조화를 이루며,
그의 시가 지금까지도 살아 숨 쉬게 만든 것이다.


보길도의 바람 속에는 지금도
낙서제의 책장 넘기는 소리와
곡수당의 웃음 섞인 시구가 어른거린다.

그 속삭임이 이렇게 전해오는 듯하다.

“고요 속에 머물고,
풍류 속에 살아라.
그것이 곧 시인의 길이다.”


✅ 보길도의 바닷길


썰물에만 드러나는 신비로운 길.

잠시 드러난 돌 위로 걸으면

마치 바다가 나를 위해 길을 내준 듯하다.

섬은 그렇게 비밀을 가르쳐준다.


3. 보길도 정보 요약


행정구역: 전라남도 완도군 보길면

면적: 약 34㎢ (연홍도보다 훨씬 큰 섬)

인구: 약 2,000명 내외

교통: 완도항 → 보길도 (고금도·노화도 경유 배편, 약 40~50분 소요)

특징: 윤선도 원림, 예송리 해송, 고전 시 문학 유적

대표 명소: 세연정, 예송리 해송숲, 동천석실, 보길 바닷길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 바다를 읊은 사계의 노래

계절이 머무는 어부의 삶을 그리다.


《어부사시사》는 1651년, 65세의 나이로 보길도 부용동에 은거한 윤선도가 지은 연시조 작품이다. ‘춘·하·추·동’ 사계절 각 10수씩, 총 40 수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작품은 고려 후기의 고전 「어부가」, 조선 중기에 이현보의 「어부사」를 계승하면서, 윤선도가 자연과 은거의 즐거움을 섬세하게 노래한 연시조의 정수로 평가받는다.


하루의 리듬, 여음으로 흐르다.

각 수 사이에는 '여음(餘音)'—즉 시적 후렴구—이 일정하게 배치되어 있어 출항에서 귀항까지 어부의 하루를 리듬감 있게 구성한다.

예를 들어, “배 띄워라 배 띄워라”, “닻 들어라 닻 들어라” 같은 반복 구절과 “지국총지국총 어사와” 같은 의성어가 어우러져 시 전체에 현장감을 더한다.


자연과 은거의 정서

윤선도는 자신을 ‘가어옹(假漁翁, 젊은 시인의 자칭 어부)’이라 표현하며, 실제 어부가 아닌 강호 자연을 사랑하는 은거 시인으로서 자연 속에서 느끼는 한가로운 흥취를 읊는다.


‘춘사’에서는 꽃피는 강촌을, ‘하사’에서는 소박한 어부의 일상을, ‘추사’는 고즈넉한 가을 풍경과 함께 세속을 떠난 여유를, ‘동사’에서는 겨울의 고요 속에서 은근한 근심마저 함께 담아낸 고요한 성찰을 느낄 수 있다.


예시 한 대목 — 봄(춘사 1)의 한 구절

“앞개울에 안개 걷히고 뒷산에 해 비친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썰물 거의 끝나고 밀물 밀려온다
지국총지국총 어사와
강촌 온갖 꽃이 먼 빛이 더욱 좋다!”

잔잔한 아침 풍경이 시각과 청각을 통해 곧장 다가옵니다. 안개가 걷히고 햇살이 비치면, 배는 조심스레 바다로 나가고, 그 순간의 정서가 “지국총… 어사와”에 담긴 리듬과 함께 살아 숨 쉰다.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개요

지은이: 윤선도 (1587~1671)

형식: 연시조(시조 40수, 춘·하·추·동 각 10수씩)

특징: 고려 말 「어부가」와 이현보의 「어부사」를 계승.

주제: 자연 속 한가로운 어부의 삶, 강호은일(江湖隱逸)의 정서.

후렴구: "지국총지국총 어사와" (사철 내내 반복)


1. 봄사(春詞) 中 제1수

앞 강물에 안개 걷히고 뒷산에 해 비친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썰물 거의 다하고 밀물이 다가온다.
지국총지국총 어사와,
강촌의 온갖 꽃이 아득히 더욱 좋다.


2. 하사(夏詞) 中 제1수

한가로운 여름날에 지팡이 짚고 나가,
시내 물에 발 담그고, 시원히 앉았으니,
풍월주인(風月主人) 되어 이 몸이 한가하다.
지국총지국총 어사와,
천지간의 좋은 경치 내 것인 줄 어떠한고.


3. 추사(秋詞) 中 제1수

서리 내려 잎이 떨어지고 기러기 소리 슬프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저녁 갈매기 무리 물 위에 내려앉는다.
지국총지국총 어사와,
어부의 늙은 얼굴도 가을빛에 젖었도다.


4. 동사(冬詞) 中 제1수

눈서리 치는 날에 강호에 배 띄우고,
낚싯줄 드리우니, 고기들은 숨었구나.
어부의 마음 또한 고요히 비었도다.
지국총지국총 어사와,
세상 시끄러운 일은 다 잊고 지내리라.


전체 의의

《어부사시사》는 단순한 어부의 노래가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살며 속세를 벗어난 삶의 태도를 노래한 작품이다. 그래서 "한국 연시조 문학의 절정"이라 평가받는다.


4. 섬, 읊다


보길도를 걷는 일은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시를 읊는 일에 가깝다.

정자에 앉아 바람을 읽고,
바닷길에 서서 파도를 듣고,
소나무 숲에 기대어 눈을 감으면
나도 어느새 한 구절의 일부가 된다.

윤선도가 남긴 <어부사시사>의 노랫말이
지금도 바람에 실려 온다.

"봄을 노래하고, 여름을 노래하고,
가을을 노래하고, 겨울을 노래한다."


그 사계의 노래는
섬의 하루와 계절, 그리고 사람의 마음까지 품어낸다.


5. Epilogue

보길도는 내게 이렇게 속삭였다.

“당신 마음에도,
아직 채우지 못한 시 한 구절이 있지요?”

“그 빈 구절,
이 바람에 실려 두고 가세요.”


나는 오래된 정자 앞에서 멈췄고,
시인의 그림자를 따라 걸었으며,
예송 숲길에 앉아
보길도를 그리지 않고도
기억 속에 시구를 적어두고 있었다.

“보길도에서의 하루는,
길을 읊는 일이자,
기억을 시로 새기는 시간이다.”


♡-Legend
《바다에 심은 시》
-“노래하는 이는 섬이 된다.”


옛날, 보길도에는
젊은 시인이 홀로 귀양 와 살았어.

사람들은 그를 두고 이렇게 말했지.

“저이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야.”

“아냐, 바다에서 시를 주운 사람이래.”


시인은 날마다 바닷가에 앉아

파도 소리를 베껴 적었대.

그가 남긴 <어부사시사>는

사계절의 노래가 되어

섬 전체에 울려 퍼졌지.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아이들이 장난 삼아
정자 기둥에 시 한 구절을 따라 썼어.

“어부사시사.”

그날부터 시는 바람처럼 번졌대.

누군가는 지붕 밑에,

누군가는 바위 위에,
또 누군가는 노래 속에 새겨 넣었지.


사람들은 알게 되었어.
시란, 혼자 읊는 게 아니라
모두가 살아내는 힘이라는 걸.


시인은 결국 떠났지만,
그의 시는 남았지.
그리고 지금도 보길도의 바람엔
이 문장이 실려 있다고 해.

“노래하는 이는 섬이 된다.”


보길도의 정원을 걷다 보면,
어디선가 시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느덧—
섬 자체가 한 권의 시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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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 thing Special》: 《붓 대신 바람, 보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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