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 마렌, 꽃을 다시 부르다
하루에게는 늘 내일이 있었어.
오늘 하지 않은 일도,
오늘 하지 못한 말도
내일 하면 된다고 믿었지.
그래서 하루는
숙제도 내일,
놀자는 약속도 내일,
친구에게 건네야 할 말도
자연스럽게 내일로 미뤘어.
내일은 늘 오늘보다 느긋해 보였고,
오늘보다 쉽고 편해 보였거든.
민우는 하루를 정말 좋아했어.
같이 놀고 싶고,
같이 공부하고 싶고,
숙제도 나란히 앉아하고 싶었어.
그래서 민우는 매일 물었어.
“오늘 같이 할래?”
“오늘 끝나고 놀자.”
“오늘은 잊지 말고.”
하루는 늘 고개를 끄덕였지.
“그래.”
“이따가.”
“내일 하자.”
민우는 처음엔 그걸 모두 믿었어.
내일은 정말 올 거라고.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기다리는 시간만 길어졌어.
민우는 혼자 놀았고,
같이 하기로 한 숙제를 혼자 끝냈어.
그날 밤,
민우는 작은 공책을 꺼냈어.
그리고 일기를 쓰기 시작했지.
✎
오늘 하루랑 놀기로 했는데
하루가 안 왔다.
괜찮다.
내일은 올 거니까.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비슷했어.
✎
오늘도 하루는 내일 하자고 했다.
하루는 나를 싫어하는 걸까?
그래도 묻지는 않았다.
글씨는 날마다 조금씩 작아졌고,
문장도 짧아졌어.
✎
오늘은 약속을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또 기다려야 하니까.
이사 가기 전날 밤,
민우는 마지막으로 공책을 펼쳤어.
✎
하루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다.
그런데 내일 하면 된다고 했던 말들은
아직 하나도 못 했다.
✎
하루야, 나는 네가 좋아.
그래서 기다렸어.
하지만 기다리는 건 조금 아팠어.
✎
약속은
기억해 주는 마음이야
하루야.
민우는 공책을 접어
하루의 책상 서랍 안에 넣어두었어.
이사 가기 전에 하루를 꼭 만나고 싶었지만
만날 수 없었기 때문이야.
다음 날,
교실 창가 자리가 비어 있었어.
민우의 책상은 말끔했고,
서랍 안에는 그 공책만 남아 있었지.
하루는 공책을 꺼내 천천히 읽었어.
페이지를 넘길수록 가슴이 아파왔어.
민우는 화를 내지 않았고,
울지도 않았어.
그저
기다렸고, 기록했을 뿐이었어.
하루는 그제야 알았어.
자기가 미룬 건 일이 아니라
마음이었다는 걸.
집에 돌아온 하루는
가방도 내려놓지 못한 채
방바닥에 앉아 울었어.
“한 번만…
한 번만 오늘이 다시 오면 좋겠어.”
그 울음은 크지 않았지만, 진짜였어.
그 슬픈 소리를 마렌이 들었어.
마렌은 바람처럼 나타났어.
하루 앞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그저 울음이 끝날 때까지
곁에 있어 주었어.
하루가 흐느끼며 말했어.
“나는…
기다려준 마음을 잊고 있었어.”
마렌은 고개를 끄덕였어.
“그래서 지금 네 마음이
이렇게 아픈 거야.”
그 순간, 하루의 집 정원 발치에서
작은 푸른 꽃이 피어났어.
하늘빛 꽃잎에 노란 점이 박힌 꽃.
물망초였어.
꽃이 속삭였어.
“나를 잊지 말아 줘.”
“기다렸던 마음까지도.”
하루는 꽃을 바라보며
조용히 고개를 숙였어.
그때,
빛처럼 요정 리아가 나타났어.
리아는 말했어.
“이 꽃은
잊지 말아 달라는 부탁으로 피어나지만,
기억하겠다는 약속이 생기면
정원으로 돌아갈 수 있어.”
하루는 조용히 말했어.
“다음엔…
절대 내일로 미루지 않을게.”
그 순간, 물망초가 부드럽게 빛났어.
리아는 꽃을 들어 올렸고,
빛의 길이 열렸어.
“이제 너는
사람의 마음을 살리는 일을 했어.
꽃의 정원으로 돌아가렴. ”
물망초는
잃어버린 정원으로 돌아갔어.
불에 탄 정원은 황폐했지만,
그곳에서
또 하나의 꽃이
조용히 뿌리를 내렸지.
마렌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느꼈어.
자신이 지켜보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치유하는 존재가 되고 있다는 걸.
꽃이 사람을 돕고,
사람의 마음이 정원을 되살릴 때,
마렌의 빛도
조금 더 또렷해졌어.
그날,
마렌은 진정한 요정으로
한 걸음 다가갔어.
그리고 하루의 마음속에는
아직 보이지 않지만
사라지지 않는
작은 푸른 꽃이 남아 있었지.
잊지 않겠다는 약속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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