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석모도 (席母島)
육지와 섬 사이에서 건져 올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의 섬.
“다리로 들어가지만, 마음은 배를 탄다.”
석모도(席母島).
席—앉아도 되는 자리,
母—품어주는 마음,
島—경계의 쉼.
이 섬은 말없이 자리를 내어준다.
“여기선, 그냥 앉아도 돼.”
우리는 섬을 떠올릴 때 대개
‘멀리 가야 하는 곳’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석모도는 묻는다.
정말 섬은, 멀리 있어야만 섬이냐고.
석모도는 강화도 옆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사이를 잇는 석모대교는,
지도를 접을 만큼 긴 여정이 아니라
일상을 살짝 접어 두는 정도의 거리만 허락한다.
이 섬의 시간은 급하게 흐르지 않는다.
햇빛은 논과 들판을 평평하게 눌러주고,
바다는 과장 없이 반짝이며,
바람은 사람의 생각을 정리하지 않고 그냥 비워준다.
그래서 이 섬에서는
‘뭘 해야 한다’는 생각보다
‘그냥 있어도 된다’는 감각이 먼저 온다.
걷다 보면 알게 된다.
여행은 어쩌면
새로운 것을 더하는 일이 아니라,
지나치게 꽉 조여진 나를
한 칸 풀어놓는 일이라는 것을.
석모도의 풍경은 화려하지 않다.
그래서 더 오래 남는다.
항구의 그물과 밧줄, 소금기 섞인 바람, 낮은 집들.
관광의 장면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온 자리의 표정이어서
풍경을 ‘본다’기보다 풍경과 함께 ‘살아진다’.
행정구역: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면적: 약 14㎢
교통: 강화도 → 석모대교
기후: 서해 해양성 기후, 비교적 온화
석모도는 크지 않다.
그러나 몸을 둘 자리는 넉넉한 섬이다.
섬의 입구이자 마음의 속도조절장치.
건너는 동안, 생각이 조용해지고
‘도착’보다 ‘정리’가 먼저 시작된다.
바다와 들판을 동시에 옆에 두고 걷는 길.
걷다 보면 문장이 줄고,
남는 건 숨과 발걸음뿐이다.
이름처럼 담백한 해변.
파도는 크게 말하지 않고
모래는 오래 다독여 준다.
조금 더 조용하고, 조금 더 깊은 바다.
사람이 줄어들수록
풍경은 오히려 선명해진다.
일과 풍경이 아직 분리되지 않은 자리.
그물과 바람, 선착장의 소리 속에서
“삶은 이렇게 단순해도 되지”라는 생각이 스친다.
석모도는 우리에게
멀리 떠나지 않는 법을 가르친다.
도망치지 않고도,
일상을 버리지 않고도,
삶의 리듬을 잠시 바꾸는 방법.
이 섬의 풍경은 단순하다.
바다, 들판, 바람, 길.
하지만 그 단순함은 비어 있는 게 아니라
필요 이상의 것들을 일부러 비워 둔 자리다.
그 빈자리에서 사람은
자기 생각을 덧칠하고,
자기 마음을 비추고,
자기 속도를 점검한다.
석모도는 관광지가 아니다.
오히려 사색이 ‘가능해지는’ 섬이다.
석모도를 나올 때, 나는 다시 다리를 건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돌아온 건 몸이고, 남아 있는 건 마음이다.
멀리 가지 않았는데도 충분히 멀어진 기분.
아무것도 이루지 않았는데도 조금 정돈된 기분.
석모도는 말했다.
“너무 멀리 가지 않아도,
너는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어.”
가장 가까운 섬에서
나는 가장 느리게 나를 되돌아보았다.
석모도에는
예부터 섬 이름이 생기게 된 사연이 전해 내려온다.
아주 오래전,
이 섬에는 사람들이
‘석모 어머니’라 부르던 여인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마을에서 가장 부지런한 사람도,
가장 힘센 사람도 아니었다.
다만 누군가가 오면
늘 먼저 자리를 내어주던 사람이었다.
바다에서 돌아온 어부가 지치면
그녀는 말없이 평상 한쪽을 비워주었고,
길을 잃고 섬에 닿은 나그네가 있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따뜻한 밥 한 그릇과
앉을 곳 하나를 먼저 내어주었다.
“왜 늘 남의 자리를 먼저 챙기십니까?”
사람들이 물으면
석모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사람은 서 있을 곳보다
앉아 있을 곳이 먼저 필요한 법이지.”
어느 해, 이 섬에도 큰 바람과 흉년이 겹쳤다.
사람들 마음엔 여유가 사라지고
집집마다 문이 먼저 닫히기 시작했다.
그때도 석모 어머니의 집만은
늘 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자리는 남겨둬야 해.”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섬의 가장 높은 바위 곁으로 걸어 올라갔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 이후 그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사람들이 찾아 나섰지만 발자국도, 흔적도 없었다.
그 후부터였다.
석모도의 바위와 언덕들이
마치 누군가를 품고 앉은 듯 둥글고 낮게 남게 된 것이.
사람들은 믿는다.
석모 어머니는 섬 전체가
사람을 쉬게 할 자리가 되길 바라며
스스로 섬이 되었다고.
그래서 이 섬의 이름은 席母島 — 석모도.
앉을자리(席)를 내어주는 어머니(母)의 섬(島).
석모도에 오면
괜히 서성이지 않게 되는 이유도,
아무 계획 없이도 마음이 내려앉는 이유도
그 때문이라고 한다.
이 섬은 지금도 사람에게 묻지 않는다.
무엇을 하러 왔느냐고도,
얼마나 머물 것이냐고도.
다만 말없이 이렇게 자리를 내어줄 뿐이다.
“여기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
석모도에선 '쉼'이 목적이 아니라 상태가 된다.
가장 가까운 섬에서
가장 먼저 사람이 앉게 되는 이유다.
― 《섬 thing Special》: 《어머니처럼 자리를 내어주는 섬, 석모도》
여행에세이 · 섬 · 생활의 감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