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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hrjung Oct 22. 2023

개발자로서 실패한 이유

새로운 장을 향하여

처음 이 글을 시작한 이유는 개발자로서 실패한 이유를 기록하고 싶어서였다. 컴퓨터 공학을 전공해 이 회사 저 회사를 전전하며 개발자로 일을 하다가 결국은 이 일에 지쳐버린 나머지 그만둔 셈이 되었으니 나는 스스로를 개발자로서 실패했다고 여겼다.


그렇다고 그 사실이 슬프게 느껴지진 않았다. 맞지 않는 일을 꾹꾹 참으며 하다가 결국은 포기한 거니 해볼 만큼 해 본 실패자, 이 일을 그만둬도 미련 없는 실패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십 년 간의 개발자 실패기를 기록하고 싶었다. 왜 나는 실패했는지 알고 싶었고 무엇 때문에 더 이상 이 일을 할 수 없다고 느꼈는지 글로 정리해 두고 싶었다.


회사에 퇴사 통보를 하고 가깝게 지냈던 동료들과 회사를 그만두고 무엇을 할 건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나: <나는 왜 개발자로 실패했는가>에 대한 에세이를 쓸 거야.

동료들: 네가 무슨 실패를 한 거야? 너는 능력 있는 개발자다! 계속 개발자로 일해야만 한다!


나는 그냥 ’저 친구들은 나를 잘 모르니까.... 그냥 나 기분 좋으라고 해준 얘기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전 친구에게 안부 연락 하나가 왔다.


Y: 잘 지내? 여행 중인데 글은 여전히 쓰고 있니?

(나는 일을 그만두자마자 어머니와 함께 유럽 이곳저곳을 여행 중이다)

나: 응. 개발자로서 실패한 이유라는 글을 쓰고 있어.

Y: 그게 무슨 말이야, 개발자로서 실패했다니...?


나는 그때 다른 도시로 운전을 해서 갔어야 하는 터라 친구 Y와 계속 메시지를 주고받지 못했다. 그 사이 Y는 내게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Y: .... 중략 .... 너는 개발자로서 실패하지 않았어. 네가 이룬 것들을 봐. 한국에서 독일로, 대기업에서 스타트업까지. 객관적으로 봐도 넌 개발자로서 절대 실패하지 않았어. 넌 단지 이제 개발자로서의 장을 끝내고 다른 인생의 장을 펼치려 준비하는 것뿐이야.


그렇구나. 나는 개발자로 실패한 게 아니었구나.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다. 개발일이 맞지 않아서 그만뒀다고 실패한 건 아니었다. 친구 말대로 나는 지난 10년간 한국의 대기업, 외국의 스타트업과 주식상장한 회사에서 일해보고 그중 몇 곳에서는 꽤 괜찮은 성과도 받았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도 새 회사에 레퍼런스 해주겠다던 동료들과 매니저도 있었고 직전에 그만둔 직장의 경우는 언제든 다시 돌아와도 환영이라고 했다.


남들이 내게 하는 말과 평가는 뒤로 미루고 스스로를 돌아봤을 때도 실패한 개발자라는 말은 맞지 않아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사회생활을 하는 데 스트레스를 느끼고, 승진이라는 제도를 싫어하고, 사무실보다는 집에서 일하는 걸 좋아하고, 개발공부에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스스로를 실패한 개발자라고 여길 필요가 없었다. 이것은 개발자로서 성공도 실패도 아닌, 단지 내 인생 이야기에서 개발자로서의 장은 여기까지였을 뿐이었던 거였다.


그러고 보면 이 글들은 개발자의 실패기가 아닌, 개발자로서 지낸 내 인생의 장을 조금이나마 잘 마무리 짓게 도와준 회고기였던 듯하다. 글을 쓰는 동안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나는 어떤 환경을 선호하며, 어떤 종류의 일을 하고 싶고, 내가 앞으로 살아 가며 느끼고 싶은 온도는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미지의 동굴속으로

이제 이 개월 간의 어머니와의 유럽 여행이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다. 여행을 하다 조그맣게 깨달은 게 있다면 아무리 여행 계획을 하고 다닌다 한들 예상치 못한 날씨, 도로, 그리고 사건들이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거다. 그리고 계획하지 않았던, 생각지도 못했던 절경들을 만나기도 하고 말이다.


지금 내 앞에는 흰 백지의 다음 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다가올 새로운 장에서는 어떤 자국들을 만들어갈까? 나는 어떤 온도를 지닌 사람이 되어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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