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ka 직업병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고 개발자로 수년을 일한 덕(?)에 내게 남겨진 어떤 자국 같은 것들이 있다. 평소에는 잘 몰랐는데 가끔씩 다른 직종에서 일하는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무언가 개발자 친구들과는 다른 흐름의 대화가 흘러간달까...? 이야기를 나누는 주제는 비슷해도 대화의 분위기가 다르다고 해야 하나....?
IT 회사에서 개발자들과 일하는 문과 출신 기획자 A 씨의 말에 의하면 나는 진정 개발자스러운 사고구조로 생각하고 말한다고 했다. 그리고 해가 갈수록 그 증세(?)가 심해졌다고....
그렇다면 비개발자들이 느끼는 근 십 년 넘게 내게 새겨진 개발자 자국들은 어떻게 생겼을까?
1. 논리적 오류(?)가 있는 말은 이해를 못 한다
컴파일 에러가 생기면 프로그램이 실행되지 않듯 상대의 말에 약간의 논리적 비약이 있거나 말과 말 사이 구체적 설명이 생략되면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대화에는 맥락이라는 게 있으니 분명 이해를 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개발자로 일을 하다 생겨버린 습관 탓에 - 무엇이든 명확하고 정확해야 한다는 습관 - 무엇이라도 한 군데가 빠져있는 대화에서는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콕 집어 지적하고는 다음 맥락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심지어는 ‘당신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으니 처음부터 다시 말해줄 수 있겠냐’고 부탁할 때도 있다. 친구랑 대화하는 건 프로그래밍을 하는 게 아닌데도 말이다.
2.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하려 한다
프로그램을 만들고 테스트케이스를 작성할 때면 최대한 많은 경우의 테스트 시나리오를 생각해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짓을 몇 년 동안 했더니 여행 계획 을 하다가 숙소를 정할 때는 어떤 날짜에 어디로 갈지도 최대한 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보고, 상대와 함께 음식 메뉴를 고를 때도 어떤 조합으로 먹어야 과식하지 않고 다양하고 맛있게 먹을 수 있을지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고려한다.
그런데 이런 수많은 옵션 탓에 결정장애 현상이 나타나곤 한다. 예를 들어 한국 음식을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외국 동료들과 함께 갈 한식당을 결정한다고 해보자. 식당들을 고르고 골라서 식당 A, B, C가 후보군에 올랐고 각각의 특징은 아래와 같다.
A: 엄청 맛있는데 가격이 사악함. 회사에서 거리가 가까움.
B: 퓨전 한식 느낌이라 전통적 맛이라고는 할 수는 없지만 가격은 저렴. 회사에서 거리가 가까움.
C: 맛있고 가격도 저렴. 그런데 회사에 거리가 상당히 멀다.
그렇다면 나는 어느 식당을 동료들에게 소개해 줘야 하는 걸까? 모두가 좋아할 수 있는 식당이었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 모든 테스트케이스를 패스했으면 좋겠다).
3. 내 계획 안에 없는 일이 벌어지면 불안해한다
소프트웨어 설계, 시스템 디자인, 프로그램 개발 및 구현, 테스팅 등은 하나의 소프트웨어를 최대한 에러 없이 안정적으로 굴러가게 만들기 위한 일들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개발자들은 이 일들에 모두 참여한다. 혹여나 발견하지 못했던 에러가 발생하더라도 당장의 hot fix 없이도 시스템이 무한대로 죽어버리는 일 없게 미연에 방지하는 코드를 넣는 것 또한 개발자라면 해야 할 일이고 말이다.
이런 일의 사이클에 길들여진 나는 내가 계획하지
못했던 혹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지면 크게 당황하고 만다. 예를 들어 잘 알지 못하는 동네에 차를 끌고 갈 때면 미리 주차장을 알아본다든가 로드뷰로 한산해 보이는 길을 미리 알아보고 도착지로 설정해 놓은 후 운전을 시작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착지에 도착했을 때 마땅한 주차공간을 찾지 못하면 나는 허둥지둥 대며 운전을 하다가 식은땀을 흘릴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는 일장일단이 있다는 말이 있듯이 개발자로 일하며 생긴 이 자국들은 좋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다. 장점은 무엇을 하든 실수가 적다는 거다. 아무래도 미리 많은 경우의 수를 논리적으로 생각해 계획하기 때문이다. 반면 단점은 의도치 않은 일이 발생했을 때 너무나도 쉽게 당황해 버리는 나머지 평정심을 잃고 만다는 거다. 예를 들면 인터뷰를 한다고 해보자. 만약 내가 전혀 준비하지 못한 질문이 나와버리면 나는 평정심을 잃은 나머지 머릿속이 새까매져버려서 그 인터뷰를 그만 망치게 된다.
궁극적으로 나 스스로에게 바라는 게 있다면 이 자국들이 지금보다는 더 유연성 있는 새로운 자국으로 거듭나기를 소망한다.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닥쳐올 일들을 미리 계획하고 대비할 줄 알면서도, 핵심적인 디테일들로부터 전체 맥락을 볼 줄 아는 눈을 갖고,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해도 그 상황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길 말이다.
아무래도.... 소망이 너무 거창한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