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ehrjung Oct 22. 2023

십 년 차

떠나기에는 아직 이른 건가요?

누군가의 눈에는 내가 그저 어리광을 부리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개발자를 그만둔다니 배가 불렀구나! 다른 직업은 쉬울 줄 아니?라고.

또 다른 누군가의 눈에는 내가 번아웃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였나 보다. 예를 들어 몇몇 개발자 동료들은 지금 당장은 슬럼프를 겪고 있는 걸지도 모르니 잠시 쉬고 다시 이곳으로 - 개발자 세계로 - 돌아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어쩌면 한평생 개발자로 일한 사람들 눈에는 ‘고작 십 년 차 주제에 이 일이 지겹다고 떠난다고?’라고 보일 지도 모를 일이다.


글쎄, 안타깝게도 난 이 직업에 소명의식이라든가 내 천직이라는 생각을 갖고 일해본 적이 없다. 게다가 이 분야에 재능 또한 없었다. 물론 더 이상의 흥미도 찾지 못했고 말이다.


특히 이 재능이라는 놈은 내게 해가 갈수록 박탈감을 안겨주었다. 이 일을 하며 재능 있는 친구들을 몇몇 만나본 적이 있다. 누군가는 알고리즘에 천재적인 두각을 보였고, 누군가는 같은 기술문서를 읽더라도 받아들이는 그 속도가 남달랐다. 또 누군가는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응용하는 데 그 모든 것을 너무나도 쉽게 해냈다. 그에 반해 나는 끙끙대며 간신히 해내고 있었는데 말이다.

상대와 나 스스로를 비교하고 싶진 않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밀려드는 박탈감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예전 같으면 노력을 해서라도 타고난 재능을 극복할 의지가 있었지만 어느새부턴가 더 이상 그 어떤 의지도 남아있지 않았다.




솔직히 십 년 개발자 경력을 여기서 멈춘다는 건 아깝게 느껴지긴 한다. 물론 그게 어떤 분야건 마찬가지일 거다. 게다가 새로운 분야의 일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 또한 막막하다. 설상가상으로 나이는 하나 둘 들어가지, 체력은 점점 깎여가지, 책임감은 쌓여만 가지....

하지만 좋아하지 않는 일을, 가슴이 뛰지 않는 일을 돈 때문에 뜨뜻미지근하게 평생 할 수는 없었다. 새로운 무언가를 다시 주니어부터 시작하더라도, 새롭게 다시 경력을 쌓아가야 한 더라도, 앞으로 살아갈 인생은 보다 뜨겁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지금 가진 것들을 그만둬서 아깝다는 마음보다 더 컸다.


중고등학교 육 년이 대학교 사 년을 합치면 총 십 년인데 나는 그 시간 동안 한 분야에서 일을 해온 셈이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는 할 만큼 했다는 거다. 고민도 할 만큼 했고, 이 분야에서 일도 할 만큼 했다. 고작 십 년 차주제에 뭘 얼마나 해봤다고 그만두니, 너는 번아웃인 것 같으니 쉬고 돌아와라, 개발자 바깥세상은 추우니 가만있거라...라고? 이봐요 형씨, 저도 많이 고민하고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라구욧!!!

이전 12화 독일 다음은 어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