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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hrjung Oct 22. 2023

무거움을 한 젓가락 덜어냈더라면

개발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나는 무언가를 무겁게 만드는데 꽤나 소질이 있다. 가볍게 써보려고 했던 글도, 일은 일일 뿐이라고 여기며 가볍게 시작하려던 다짐도, 끝내는 무거워지고 만다.

약 십 년 동안의 개발자 일지를 가볍게 기록해 보고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 자기 고찰 글이 되어 가는 것만 같다. 그게 꼭 나쁜 건 아니지만 말이다.


베를린에서는 해가 좋은 날이면 사람들은 삼삼오오 공원에 모여 음악을 틀고 놀거나 함께 운동을 하거나 피크닉을 즐긴다. 모두들 무거웠던 일상에서 벗어나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나는 베를린의 흐린 날을 사랑한다. 흐린 날에는 공원에 오는 사람들이 적어지고 모두가 무거운 표정으로 길을 걷는다. 나는 조금은 가볍게 살길 원하면서 모순적이게도 그 반대의 것을 자꾸만 잡아당긴다.


베를린의 조금 흐린날

나도 가끔씩은 가벼워질 줄 안다. 길에 꽝꽝 언 얼음을 보면 친구와 함께 트위스트 춤을 추고, 맛있는 외식을 한 날에는 길거리에서 흥얼대며 노래를 부른다.


만약 내가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개발일을 임했더라면 계속 개발자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면 올해 5월 중순 퇴사 통보를 한 후의 삼 개월은 약 10년이라는 개발자 경력 동안 가장 가볍게 일을 했던 시기인 것 같다. 더 이상의 책임감을 가질 필요 없었고, ‘마무리만 잘하자’, ‘동료들에게 피해만 주지 말자’라는 생각으로 일했다. 수많은 회의에 들어갈 필요도, 이 기술이 옳다 저 기술이 옳다 동료와 왈가왈부할 일도, 새롭게 시작하는 프로젝트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더 이상 들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가벼워진 태도와 상관없이 개발일은 즐겁지 않았다. 어쩌면 일을 대하는 가벼움이라는 타이밍이 일 년만 조금 일찍 왔었더라면 재미를 찾았을지도 모른다. 내 마음은 개발이라는 일에 지친 지 오래였고 이 일에서 벗어나 잠시 쉬고 싶다 생각한 지 꽤 됐으니 말이다.




주변의 개발자 친구들을 둘러보았다. 어떤 이들은 회사에서 일하며 배우는 것들에 기쁨을 느끼고, 또 다른 이들은 회사일은 잠시 돈을 버는 부차적인 일일 뿐 자신의 사이드 프로젝트에서 자아실현을 한다. 누군가는 나처럼 개발일에 크게 흥미를 못했지만 회사일은 회사 일일 뿐이라며 주어진 일들을 대충 끝내고 - 혹은 남에게 일을 미루고 -  나머지 시간 동안 재미있게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나라는 인간은 일이라는 걸 쉽사리 가볍게 여길 수가 없었다. 프로그래밍을 할 때면 그것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잘 해내야 한다는 중압감을 가지고 최소한의 버그를 만들어 내려했다. 버그가 일어날 확률이 줄어드는 만큼 내 체력지수도 줄어만 갔지만 말이다.


회사에서는 좋은 피드백을 받을 수 있었다. 책임감 있다, 무슨 일이든 기한 내에 해낸다, 열정적으로 일한다 등.


솔직히 처음 개발자 삼 년의 시간은 진심으로 일했다. 열정이 있었고 나름 개발일을 즐겨보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때는 내가 정해놓은 삼 년이라는 유효기간 동안 - 개발자로 살아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 후회 없이 일하고 싶었고 이 분야에서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던 것 같다.


열정이 있던 그 시간 동안은 오히려 지금보다 더 가벼운 마음으로 일했던 것 같다. 어쩌면 이제 갓 업계에 뛰어든 주니어라는 직책 덕이었을 수도, 10년 차라는 경력자가 지녀야 하는 책임감과 부담감이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만약에 다시 개발자로 일을 하게 된다면 - 주니어 때의 열정과 가벼운 마음자세만큼은 아니더라도 - 한 젓가락만큼만 무거움을 덜어내면, 이 일을 조금은 즐길 수 있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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