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시절 이후의 기억들
자기 계발휴직 당시 남는 시간 동안 독일어를 배웠고 책을 읽었고 단편 소설 몇 개를 써보았다. 수입은 없어서 가끔씩은 불안했고 불편했지만 하고 싶은 것들로 시간을 채워나가는 매일이 좋았다. 무엇보다 개발은 일절 하지 않고 기계와 대화를 하기보다는 내면과 이야기 나누며 보내는 시간들이 행복했다.
당시에 내가 가지고 있던 비자는 워킹홀리데이 비자였던 터라 일 년 후에도 독일에 계속 있으려면 직업이 필요했다. 배운 게 프로그래밍질이라고 비자를 위해 결국에는 개발자 일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대기업이 아닌, 전자제품 회사가 아닌 다른 분야의 회사에서 개발자로 일해보면 이 일을 계속해야 할지 말아야 할 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거의 일 년 만에 다시 시작한 프로그래밍 일은 생각보다 더 즐겁지 않았다. 회사의 규모가 어떻든, 전자제품 회사든 아니든 간에 누군가의 요구사항을 구현해야 한다는 사실은 같았다. 효율적으로 리소스를 사용하도록 설계하고, 테스트를 돌리고, 테스트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던 버그가 나오면 고치고, 요구사항이 바뀌면 프로그램을 또 고치고, 스파게티 코드를 refactoring 하고, 팀원들과 시스템 디자인 회의를 하고, 설계 문서를 만들고....
다른 사람들은 이 일들이 즐거울까?
한 번은 함께 일하던 몇 명의 개발자들에게 이 분야에서 일하면서 즐거움을 느끼냐고 물은 적이 있다. 누군가는 일을 하며 배우는 것들에서부터 즐거움을 얻고, 누군가는 회사일은 그저 그렇지만 사이드 프로젝트로 하는 자신만의 일에서 -결국은 프로그래밍이지만 말이다- 즐거움을 얻고, 이 기술 저 기술을 써가며 문제들을 해결하는 게 재밌다고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 또한 한 번씩은 가져보았던 생각들이다. 프로그래밍이라는 건 나의 생각과 아이디어를 실현해 주는 툴(tool) 중 하나였고 그 툴을 자유자재로 잘 쓸수록 만들 수 있는 것이 많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빠르게 발전해 가는 기술을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기술은 윤택해져 가는 반면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은 피폐해져 가는 것만 같았다. 우리 모두 디지털보다는 아날로그 세상에서 보내는 시간들을 더 늘려야 하는 것 같아 보였다.
무엇보다 내가 만들어내고 싶은 것들은 프로그래밍이라는 툴로 가능하지 않았다. 펜을 들어야 했고 직접 손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회사일은 보람이 없었고 개발일에 그 어떤 즐거움도 느끼지 못한 매일이 계속되었다. 먹고살기 위해 개발일을 계속할 뿐이었고 원치 않는 일에 여덟아홉 시간 이상의 시간을 매일 같이 보내야 하는 게 슬펐다.
물론 개발자라는 직업에 감사한 마음도 있었다. 배운 게 운 좋게도 개발이라고 굶어 죽을 일은 없었고 다른 사람들에 비해 해외에서도 보다 쉽게 취업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일을 하며 충만함을 느끼는 하루를 살고 싶었다. 내가 하는 일이 스스로에게 뿌듯함을 주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를 원했다.
안타깝게도 개발자라는 직업은 내게 더 이상 내적 충만함을 가져다주지도, 뿌듯함을 가져다주지도, 즐거움을 가져다주지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