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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hrjung Oct 22. 2023

개발자를 계속해야 할까?

신입 시절의 기억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었을 때까지도 내가 과연 개발자로서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에 답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친구들처럼 의학 전문 대학원이나 약학 대학원, 아니면 로스쿨에 진학할 마음은 없었고 전공을 살려 대학원에 갈 생각은 접은 지 오래였다. 방황의 길 위에서 나는 그저 철학과나 인문계열 학사 1학년부터 인생을 다시 시작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돈.... 돈이 문제였다. 나는 경제적으로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어야 했고 그렇기에 직업이 필요했다.

결국 사 학년 마지막 학기 때 여러 회사들을 고르고 골라 서울에 있는 금융계 IT 직 몇 군데와 공기업 몇 군데에 지원했지만 전부 탈락했다. 탈락했다고 해서 그다지 좌절을 하거나 슬프지 않았다. 금융계에 지원했던 이유는 서울로 출퇴근이 가능하다는 것 외에는 딱히 별다른 이유가 없었으니깐 말이다.


12월 겨울. 나는 무직 상태로 졸업 신청을 하려 했다. 하지만 지도 교수님이 취업이나 대학원 진학 없이 졸업은 못 시키겠다고 하셔서 결국 1년 졸업 유예를 하고 학교에서 연결해 준 회사에서 사 개월 동안 인턴생활을 했다. 장군마을 근처에 위치했던 회사는 부모님 집에서 대중교통으로 왕복 세 시간이 좀 안되게 걸렸다. 겨울날 새벽 일찍 집 근처 셔틀버스 정류장에서 회사 버스를 타고 출근하던 나날들. 한 회사에 소속되어 기쁘다는 마음보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할 일이 있고 내가 만든 게 실제로 회사에서 사용된다는 데 보람을 느꼈던 것 같다.


인턴생활 때 모은 돈으로 혼자 이 개월 동안 난생처음 유럽여행이라는 걸 다녀오고 그 이후로는 취준생으로 시간을 보냈다. 인턴을 했던 회사는 학사 졸업의 경우 취업 연계가 되지 않았고, ‘젊어서는 S에서, 나이 들어서는 L에서 일하라’는 농담 섞인 선배들의 조언을 따라 S사 연구소에 지원했다. 무엇보다 S사 연구소에 지원을 했던 이유는 그다음 해에 부서가 서울로 이사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는데 당시 나는 언제나 서울에 거주지를 두고 살고 싶어 했다.

서울에 집착했던 이유는 부모님이 서울에 살고 계셔서 - 나는 독립할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 대부분의 문화생활 할 수 있는 공간이 서울에 있어서 - 독립영화관, 전시회 등 -, 친구들 대부분도 서울에 살고 있어서였던 것 같다. 그리고 단지 직장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내가 약 이십 년 간 살아온 터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기도 했다.


마침내 나는 운 좋게도 컴퓨터 공학이라는 전공 덕에 다른 과 친구들보다 보다 쉽게 취업을 하게 되었다.




회사에 입사하기 전 나 스스로에게 한 약속이 있다. 삼 년 안에 이 직업을 계속 가질지 말지를 결정할 것. 썩은 동태눈이 되지 말 것. 회사에 절대 길들여지지 말 것.

어렸을 때 비구니 스님이 지어준 내 법명은 “청정안”이었다. 나는 이 청정안이라는 법명을 지키기 위해 나 자신을 철저하게 지켜나가기로 다짐했다.


그룹 연수와 사업부 연수는 좋게 말하면 애사심을 위한, 나쁘게 말하면 세뇌를 위한 교육 활동으로써 신입사원들을 한 곳에 몰아놓고 그룹 경영의 원칙이니 계승해야 할 정신이니 등을 배우게 했다. '나는 이런 걸 하려고 회사에 들어온 게 아닌데. 하루빨리 실무에 투입되고 싶은데.'라는 생각을 하며 약 이 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그룹 교육을 꾸역꾸역 해냈다.


나중에 그만두게 되더라도 후회 없이 떠나고 싶었고 일 잘한다는 소리도 듣고 싶었다. 무엇보다 스스로 정해 놓은 삼 년이라는 제한시간을 잘 보내고 싶었다.

주말이면 개발 스터디, 논문 읽기, 사이드 프로젝트 등 다양한 활동을 했고, 주중에는 아침 일찍 출근해서 개발 공부를 하고 근무시간에는 눈이 빠져라 일을 하고 야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와중 나 다움이라는 걸 놓치고 싶지 않았다. 윗사람에게 무조건 예예 하지 않았고, 하고 싶은 말이나 해야 하는 말이 있으면 하려고 했고, 싫은 건 싫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다 나중에 들어온 이야기는 ‘네가 지금은 사원이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야’라는 비꼬는 말들 뿐이었지만 말이다. 기분은 불쾌했지만 찌질한 사람들 말은 무시하기로 했다.


이런 내 기(?)를 눌러보겠다는 상무 직책의 조직장이 하루는 내가 만든 보고서를 가지고 회의를 하다가 부러 크게 화를 내며 혼을 낸 적이 있었다. 나는 너무 분한 나머지 회의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가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나중 회식 때 술에 취한 조직장이 하는 말로는 내 기를 한 풀 꺾어야 할 것 같아서 그런 거라고 했다. 나원참.... 의견을 마음대로 피력하니 기가 센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다 어찌어찌 삼 년이 흘렀다. 나는 이곳을 떠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해야 했는데 그만 아파버렸다. 수술을 했고, 병가를 냈고, 이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는 회복 시간이 필요했다.

몇 개월간의 회복 시간 동안 지난 몇 년의 삶을 되돌아보았다.

이렇게 까지 나를 갉아내며 살아야 하는가? 나는 수직적 구조의 기업문화에 지쳐있었고 - 회사가 아무리 수평적 구조를 지향한다 하더라도 이미 수직적 구조에 길들여진 기존 조직은 바뀌기 쉽지 않았다 - 사내 정치질에도 전혀 자신이 없었으며 한국 기업문화에 더 이상 적응하기가 어려울 것 만 같았다.


무엇보다 이곳에서는 내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에는 전자 회사라는 거대 기업에 갇혀서, 여기서 주는 복지에 맛 들인 나머지, S회사 임직원이라는 뽕에 취해 그 어디에도 갈 수 없는 배부른 돼지 한 마리가 되어 있을 것만 같았다.

물론 누군가처럼 높은 고과를 받으며 임원을 꿈꿔 볼 수도 있었고, 대충 일하면서 월급루팡을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두 가지 모두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고 물살에 휩쓸리는 대로 사는 삶을 살고 싶지도 않았다.

어떻게든 하루빨리 이곳을 탈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병들고 싶지 않았다. 내 삶의 방향은 나 스스로 결정하고 싶었다.


나는 19년도에 자기 계발 휴직을 신청했고 (일 년 무급 휴직 제도) 4월에 베를린으로 떠났다. 하지만 여전히 개발자라는 직업을 계속해서 가져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답은 찾아내지 못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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